나는 예배자

하박국, 스바냐, 학개 묵상

차작가 2025. 5. 8. 11:52

오래된 일이지만,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는 시간, 그것이 얼마나 깊은 마음의 상처가 되는지—나는 절실히 겪었다.

카이스트 70인 헌신의 밤 이후,

남편과 나는 신학 공부를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미국 연구소로 직장을 옮기면서

신학 공부는 점점 마음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던 중, 주위의 권유와

과거 헌신한 것에 대한 부담감이 더해져 결국 신학교에 가기로 결단했다.

그 무렵, 교회의 배려로 평신도로 섬기던 교회에서

남편은 주일학교 전도사로 사역하게 되었다.

나는 갑작스레 집사에서 전도사 사모가 되어야만 했다.

아무 준비 없이 맞이한 변화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큰 어려움은, 예배를 드릴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예배당에 있었지만, 예배 안에는 들어가지 못한 자였다.

당시 브라이어 우드 교회의 한국어부는 교인이 많지 않아

어른들이 성가대 연습을 하는 동안 한국어 학교를 섬겼으며,

어른들이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는 아이들 주일학교를 맡아야 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흐르자 영적인 고갈이 찾아왔다.

물론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도 했지만, 공예배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건

내 영혼에 깊은 그늘이 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남편은 미국 내에서 가장 좋은 신학교 네 곳에 입학 지원서를 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하는 신학 공부였기에 경제적인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했다.

“정말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면, 그 증표로 전액 장학금을 허락해 주세요.”

얼마 후,

지원한 모든 학교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고,

그중 유일하게 전액 장학금을 약속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믿는 가정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평범한 성도로 작은 교회만 섬기다 보니

전도사로 사역지를 찾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목회의 세계에도 인맥이 필요하다는 씁쓸한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은 작은 교회로 우리를 인도하셨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나는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어른 예배 시간에는 주일학교를 섬겨야 했고,

점심 후에는 음악 교실을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생활이 3년 넘게 계속되자,

예배는 점점 나에게서 멀어졌고 교회는 예배의 장소가 아닌 ‘일터’처럼 느껴져 쓸쓸했다.

아마 이때부터 내 안에 우울함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담임목회를 시작했을 때,

비록 아이들 포함 30명도 안 되는 작은 교회였지만,

남편은 전도사님 한 분만을 위해 1부 예배를 따로 마련했다.

공예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 깊이 알았기 때문이다.

3:18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3:19 그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3:20 내가 그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기 동안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절기를 지킬 수 없는 설움을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포로 생활 70년이 지나자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온 세상 앞에서 자녀들의 수치를 씻기시며

잃었던 명예를 회복시켜 주셨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르짖어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께 짐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목사로 섬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필라에서 가장 큰 교회였기에 예배 시간도 많아 어느 시간이든 예배드릴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남편이 신학교에 간 후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던 순간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어려웠고, 고난도 있었지만

공동체 안에 있다는 안도감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있어 서럽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에 소외된 사람이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 모든 순간이 예배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전도사 시절, 위층에서 찬양 소리가 들리고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때,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 저도 예배드리고 싶어요.”

그때, 내 안에서 조용하지만 선명한 음성이 들려왔다.

“봉사도 예배다.”

그 음성이 나를 붙들어 주었고,

그 덕분에 공부를 마치는 순간까지 버틸 수 있었다.

나는 예배가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말씀에 집중하며, 마음으로 메모하고

지금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적은 없지만,

하나님 없는 세상에 살아간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짐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 예배를 사모하는 자,

절기를 위해 근심하는 자를 찾으신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며,

수치 당한 자에게 명예를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순간에서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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