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설교

만나를 먹이신 이유 - 신명기 8장 3절

차작가 2023. 11. 21. 13:40

출애굽을 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노예 근성대로 살려고 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살던 근성이 남아있던 백성들에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끈다는 것을 양식을 공급하시는 방법으로 나타내셨다.

1. 만나가 나오게 된 배경

출 16장 & 민 11장에 기술되어 있다.

출 16: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스라엘에게 만나가 내려지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원망 때문이었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은 광야에 이르렀을 우리를 주려서 죽게 한다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그 원망을 듣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다.

그 모양은, 출 16: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민 11: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11:9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2. 만나를 양식으로 주신 특별한 의미

A.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이 있음을 보여 주는 양식이었다.

세상을 사는 방식은 일단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원리이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해서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시다면 성도로 하여금 엘리야를 살릴 때 처럼 까마귀를 통하여 먹을 것을 주실 수도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원리를 초월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방법이다.

본 구절이 의미 하는 바는 인간의 영혼 뿐 아니라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빵이지만 하나님은 만나(manna)와 같은 특별한 것으로도 인간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다'라는 의미이다(Keil, Lange). 특히 공생애를 앞두고 실시된 40일 간의 금식 기도 끝에 극도로 시장해 있는 예수님께 '돌로 떡을 만들라'라고 시험한 마귀를 향해 예수께서 본절을 인용, 답변하신 의미도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떡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선 자신의 생명을 특별한 방법으로 지속시켜 줄 것이다'라는 뜻이었다(마 4:4; 눅 4:4).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 히브리어 성경에는 '말씀'이란 단어가 없다. 따라서 정확히 번역하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란 의미이다. ASV도 이를 좇아 모든 것'(everything)으로 번역하고 있다.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주셨다. 그러나 당시 만나를 주신 것은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시기 위한 차원이 아니었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진 것은 단지 하늘에서 주신 신비한 것이라는 차원이 아니라 만나가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거두어진 열매가 아님을 의미한다.

즉, 이스라엘은 하루하루를 자기의 수고와 노력으로 거둔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살았던 것이다. 이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 바로 만나를 거둘 때 다음날 것까지 미리 거두면 썩어버리는 것이었다.

만나를 통해 하나님이 바라신 것

출 16:17-20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6: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6: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16: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다음 날 것까지 미리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루하루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됨을 배우기를 원하셨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은혜로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다음날 것까지 미리 거둔다는 것은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지 못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들의 힘으로 내일을 준비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생존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음날까지 남은 것은 썩어버리게 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만나의 역할은 분명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랬을 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들에게는 만나를 먹었다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 만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이 생명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은 애굽의 삶의 방식이고, 말씀으로 사는 것은 천국의 삶의 방식이다. 애굽은 떡이 생명으로 되어 있는 나라이지만, 천국은 말씀이 생명으로 되어 있는 나라이다. 서로가 전혀 다른 나라이기 때문에 광야를 통해서 애굽의 삶의 방식을 버리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살았다. 자기들이 손수 손으로 만들어 먹거나 일을 해서 수확한 것을 먹은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먹던 것을 요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생전 보지도 못한 만나를 내려주신 것도 애굽의 음식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살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의복도 해어지지 않았고 발도 부르트지 않았던 것도 '너희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광야에서 살고 있다. 애굽의 삶의 방식이 버려지기를 요구받는 곳에서 살고 있다. 때문에 신자는 광야가 싫고 없었으면 좋겠다는 불평보다는 광야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광야에서 신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 광야란 애굽의 것을 포기해야 하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대로 애굽의 것을 더욱 든든히 하기 위해서 뭔가 하려고 한다. 착한 일을 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려고 하는 모든 것이 애굽의 것을 포기한 가운데 나오는 자연스러운 믿음의 행동이 아니라 애굽의 것을 자기 소유로 굳건히 세우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포기가 아니라 더욱 깊은 집착과 미련에 빠져들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명령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보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여 시험하셨다. 그리고 그 방법은 그들을 낮추시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서는 누구든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하나님이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높은 자리를 쳐서 낮은 자리로 끌어내리신다. 그리고 '그래도 내 명령과 규례를 지키며 살겠느냐?'라고 물으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을 살면서 높은 자리에 있기도 하지만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되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그럴 때 하나님을 기억하는 신자라면 낮은 자리에서 '그래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갈래?'라고 하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거쳤던 광야에 내가 지금 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된 나라로 인도하시는 과정임을 깨닫고 낮은 자리에서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말씀만이 생명 됨을 고백할 때 그것이 곧 떡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된다.

예수님은 요 6:48-51에서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심

유대인들이 지금 주님을 찾아와서 출애굽 광야에서 선지자 모세에 의해 주어진 눈에 보이는 만나와 같은 세상의 떡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바로 그 만나를 예로 들어 그 만나가 상징하고 있던 것이 바로 당신 자신이었음을 재차 설명해 주셨다.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6: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출애굽 때 광야에서 주어진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잠시 배는 불렀을지 몰라도 결국은 모두 다 죽었다. 주님은 먹고 죽을 만나 정도가 아니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떡을 주러 오신 분이심을 또 다시 천명(闡明) 하셨다.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복으로 주어졌던 것이 아니었다. 만나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결핍과 굶주림이 해결되는 모양을 통해 죄와 허물로 죽은 이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의 떡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로 쓰인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죄인들은 절대 이 세상의 배부름에 의해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는 식물(食物) 이었다.

만나는 바로 그 전체를 담고 있는 시청각 자료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살아나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은혜로 살아난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에 순응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뢰하며 살아가게 될 것임을 상징으로 담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는 오히려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여 살라는 하나님의 시청각 자료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 만나를 오해하여 ‘그와 같은 세상의 떡을 우리에게 달라’고 주님께 구했었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만나를 통해 영원한 생명이신 하늘의 떡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은혜만을 좇아 살아야 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배우라는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나를 세상의 배부름을 기대하며 먹음으로 모두 죽음에 이른 것같이 세상의 배부름을 위해 나를 찾아온 너희도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는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만 의지하며 세상의 힘들을 놓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러한 하나님의 경고는 구약에서부터 잘 나타나고 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하나님께서 당신께 주신 자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라고 분명하게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육신의 배를 불리고 육신의 목을 축이는 것은 주님이 공급하시겠다는 것들의 목록에 단 한 가지도 들어 있지 않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러 오신 분이시다.

B. 만나는 장차 올 하늘나라를 기대하게 한다.

만나는 이 세상에 없는 양식이다. 그래서 만나라는 말의 뜻은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만나는 어디서 온 것일까?

시 78:24 그들에게 만나를 비 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하늘에서 내린 양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징적으로 보여 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다른 세상이 또 있다는 것이다.

예) 어릴 때 바나나 는 우리 나라 말고 다른 나라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줬다. 가나안을 정탐한 사람들이 가지고 온 열매를 보면서 가나안 땅이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색다른 것을 보면 다른 나라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동경하게 된다. 만나가 이런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살지만 여기는 우리의 영원한 나라가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진짜 삶은 가나안에서의 삶이다. 광야는 다만 약속의 땅을 위한 준비된 것에 불과했다. 신자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는 것이 전부이지만 신자는 다르다.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삶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은 단지 우리를 천국에서 천국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 천국에서 필요 없는 것을 버리게 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졌다. 버리라고 살게 하시는데 오히려 가지고 모으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을 어떻게 천국에 갈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낮아진 자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사랑이다.

결론: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 주신 이유는 이젠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였고 또 그렇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늘나라가 있다는 확실한 소망을 주기 위해서 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