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54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 거늘
55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절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절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절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절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절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본문 해석:
1.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었나?
1) 스데반 집사 등장 배경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2) 그의 신앙: 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2. 스데반이 잡혀 오게 된 배경
6:9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6: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6: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6: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6: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3. 스데반이 순교하게 된 이유
7:54 그들이 이 말(구약의 역사,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듣고 마음에 찔려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를 향하여 이를 갈 거늘
4. 자존심
인간관계에서 힘든 것 중에 하나는 누군가에게 바른 말을 하는 것(충고)이다. 물론 바른 말이 상대방의 잘못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상관이 없지만 만약 상대방의 잘못과 실수를 드러내는 바른 말이라면 그동안 유지해온 인간관계가 깨지거나 서먹하게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상대방이 기분 나빠할 것을 우려해서 잘못임을 알고도 모른 척, 또는 아닌 척 넘어가게 된다.
분명 이것은 매우 힘든 문제이다. 그래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를 전하는 것보다도 친한 인간관계에서 예수를 전한다는 것이 더 힘들다. 친하다는 인간관계가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넘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옳고 그름을 알면서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게 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사람이 그보다 어린 사람의 잘못을 지적을 하면 공손히 들을 수는 있다. 요즘은 이마저도 보기 힘들지만 어쨌든 어른이 바른 말을 하면 어린 자는 듣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그것도 어른의 말이 맞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른이라는 힘에 눌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기보다 어리거나,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을 할 때 과연 그 바른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란 게 있다. 사람은 자신이 무너지고 깎이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어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모습이고 본능이다.
오늘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그는 구약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말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이 되었다. 마음에 찔림이 되었다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가 옳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스데반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스데반은 그들의 분노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이것을 보면서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은 나쁘다. 왜 스데반이 맞는 말을 하는데도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스데반을 죽이는가?'라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는 소경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데반을 죽이는 그들의 분노에서 우리의 분노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대 교회에서 갈수록 말씀이 말씀대로 증거 되는 것이 사라지고 있다. 물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면서 진리만을 증거하는 것이 자신이 할 일임을 잊어버리고 있는 목사가 큰 문제이다. 그러나 더 문제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분노에 있다.
진리는 절대로 우리를 변호하거나 옹호하지 않는다. 진리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고 덮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는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기를 즐겨 한다. 즉 자신의 약점과 더러움은 드러내지 않고 깨끗하고 의로운 존재인척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려고 한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죄 속에서 보여지고 증거 되며, 인간의 의로는 사랑과 은혜는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이 지적되고 드러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진리를 사랑한다면 진리가 우리의 불의함을 지적할 때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불의함에서 은혜가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진리가 증거 될 때 진리를 증거하는 자에 대해 마음속에 분노를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그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자신에 대한 악한 감정으로도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될수록 진리를 드러내기보다는 감추어버리고 대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교회적인 사업을 중심으로 복음 아닌 복음을 전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51-53절에 보면 스데반이 "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7: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7: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라고 외친다.
그들의 조상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던 것처럼, 애굽 사람들에게 매를 맞는 이스라엘을 구해준 모세에게 오히려 반발을 했던 것처럼 너희들이 그와 똑같이 행한다고 하셨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한 것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잘 되는 것을 참지 못한 시기심 때문이었다. 인간은 경쟁에 익숙하다. 경쟁을 쉬지 않는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시기로 인해서 예수님을 배척했음을 알아야 한다. 사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만약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성경을 잘못 알고 있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크게 오해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리에 관심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마음이 찔릴 때 그 말씀에 굴복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가는 것만 봤다. 자신들은 작아지고 상대방이 커지는 것으로 봤다. 이에 대한 시기심으로 예수님에 대해 분노하게 된 것이다.
스데반이 설교하는 것은 과거 조상들이 시기심으로 요셉을 팔아 버리고 모세를 배척했던 것처럼 너희들도 예수님을 시기하고 죽였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너희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스데반 설교의 중심이었다.
스데반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장로들의 잘못됨을 지적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교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죄에 있는가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설교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어야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취한 조치가 무엇인가를 보게 될 것이고, 결국 하나님이 행하신 조치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데반이 말한 인간의 시기심의 예는 또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셨다. 모세가 애굽의 궁에서 자라게 되고 나중에 자기 형제의 고통당함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쳤다. 그런데 다음에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만류하자 오히려 모세를 배척했다.
26-27절의 " 7: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7:27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 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조상의 잘못된 모습이었다. 자신을 도와서 남을 비판해 주는 것은 잘도 용납하면서 자신들의 잘못됨을 비판할 때는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임을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꼭 옛날 이스라엘처럼 행동하지 않은가? 내가 곤란에 처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도와서 내 편에 서서 상대방을 비판하면 좋아하면서 막상 나 자신을 비판하고 나의 잘못됨을 드러내면 참지 못한다. 이것은 진리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이다. 진리가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옹호하면 진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진리가 나 자신의 잘못됨을 비판하고 드러내면 밀쳐내려고 한다.
스데반은 또 우상에 대해서 손으로 지은 성전에 대해서도 말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되고 보이지 않는 하늘에 대한 소망은 사라져 버린 채 입으로만 하나님을 말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하늘에 대해서 말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진리는 관심 밖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예수님이 증거하시는 말씀에 대해서도 전혀 마음 두지 않았음을 선포하셨다.
본문을 보면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는 유대인들이나 요셉을 시기하고 애굽에 팔아버리고 모세를 배척한 이스라엘과 같은 사람이다. 그들과 동일한 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다. 그러한 우리들이 스데반의 설교에서 마음에 찔림조차 없다면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마음에 찔림이 있다면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분노하기보다는 말씀에 굴복해야 한다. 말씀에서 우리의 잘못됨과 죄가 무엇인가를 보고 우리에게 진심으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결론:
스데반의 관심은 오직 진리에 있었다. 진리를 전한다는 것만 생각했지 진리를 전함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 그 마음에 가득 채워졌기 때문에 죽으면서도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었다. 스데반은 진리를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우리 스스로를 보면서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진리를 말하되 진리로 살아가는 것은 도외시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진리를 말하되 진리로 사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에 찔림이 있을 때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요셉을 시기했던 이스라엘의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보내신 모세를 배척한 것처럼, 진리를 말하되 진리로 살아가지 못하는 그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현재의 모습이다.
우리의 잘못된 시기심과 자존심이 우리를 그러한 길로 끌어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시기심과 자존심이 무너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힘으로 되는 것이다. 말씀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불의하며 무능력한 존재이며 무가치한가를 철저히 인식할 때 나의 자존심과 시기심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주님 가신 길로 나를 붙들어 가시기를 소원하며 기도해야 한다.
'사도행전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돈으로 살 수 없고 함부로 받을 수 없는 성령 - 사도행전 8장 9-25절 (1) | 2023.12.12 |
---|---|
목적이 뚜렷하면 길이 보인다 - 사도행전 8장 1-8절 (1) | 2023.12.10 |
성도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 사도행전 6장 8-15절 (0) | 2023.12.10 |
교회가 진정으로 힘써야 할 것 - 사도행전 6장 1-9절 (0) | 2023.12.10 |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 사도행전 5장 27-42절 (0) | 2023.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