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우리는 기적을 대할 때 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첫 번째는 기적을 일으킨 당사자를 우상으로 섬기게 된다. 이것이 사람의 연약함이다.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을 하나님 보다 우선시 생각하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둘째는 기적을 체험한 당사자를 부러워한다
세 번째는 기적을 체험한 당사자를 하나님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셨으면 혹은 얼마나 믿음이 컸으면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는 우리들에게 오늘 본문을 무엇을 말해 주는 지 살펴 보자.
본문 해석:
베드로의 전도: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복음 전하기 좋은 상황이 마련되었다. 사마리아, 이제는 이방 지역인 룻다(32-예루살렘 서북쪽 40km 떨어진 지중해변의 도시, 주피터의 도시라고 함), 욥바(38- 지중해와의 창구 역할을 하는 항구도시)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된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졌다.
이방 지역에서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이방 지역에 전도 시 필요한 것이 기적이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애니아를 고치시고, 병들어 죽은 도르가를 살리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주를 믿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베드로가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기적이 아니었다면 주를 안 믿었을 것인데 베드로가 기적을 행해서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베드로가 하니까 일이 되고 안 하면 일이 안될 거라는 생각을 해선 안된다. 결국 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배제해 버린 생각이라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다.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일해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다'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능력한 분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일하신다. 인간이 일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일들을 스스로 다 이루어 가신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신자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까?'라는 반발이 생길 수 있다. 평소에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반발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반발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동안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부지런을 떨었던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을 믿었던가?'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던가?' 여기에 대해 깊이 돌아봐야 한다.
우리는 베드로가 갔으니까 애니아의 병이 고쳐지고 죽은 도르가가 산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만약 베드로가 안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문제가 우리의 관심거리가 되어선 안된다. 애니아나 도르가가 죽고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드로를 내세워서 기적을 일으키시는데 과연 그 기적이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하느냐를 봐야 한다.
I. 먼저 기적을 일으킨 사람을 능력자로 우상화 시키지 말아야 한다.
기적의 능력은 오직 예수께만 있다.
베드로의 치료할 때 하는 말을 보면, 한 번도 자기의 능력을 과시한 적이 없다.
9: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2. 쓰임 받는 일군으로 생각했다.
자신을 통로로 생각하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애니아와 도르가를 살리기 위해서 베드로를 그들에게 보내시고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룻다와 욥바의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보내시고 기적을 보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심을 베드로에게도 기적에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기적의 사건이 사람들을 어디로 이끌어 가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는가를 깨닫게 된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하다.
물론 애니아와 도르가가 살게 된 것은 분명하다. 당사자들에게는 분명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들이 중풍병에서 고침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했다거나 하나님께 봉사하는 사람으로 살았다더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고침 받고 살았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차라리 그들이 '기적을 체험하고 더욱 예수를 믿었다'라고 말한다면 '그래 그런 기적을 체험했으니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생기겠지'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도 믿음을 위해서 체험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첫 번째 질문의 답:
그런데 성경은 전혀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도 기적을 일으킨 사람도 안중에 없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본문에서 애니아와 도르가는 마치 엑스트라처럼 보인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기적을 직접 체험한 당사자들인데도 불구하고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라는 식으로 그들을 평가하지 않고 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일들을 보면서 어떤 시선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36절의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는 구절을 보면 마치 도르가가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이 그가 평소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본다면 도르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이 무엇일까? 다시 원상 회복되는 것밖에 더 있을까? 도르가는 죽기 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난 것이다. 그러면 도르가에게 주어진 이익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살았다고 해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된 것은 아니다. 살았으나 결국 다시 죽어야 할 몸 그대로였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냥 죽게 놔뒀으면 천국에 편히 쉴 것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나사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렸지만 나사로는 살았을 때의 몸 그대로 산 것이다. 다시 살았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몸이 된 것이 아니다. 때문에 그런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베드로의 기적은 애니아와 도르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가게 하고 주를 믿게 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보내어 그러한 기적이 있게 하신 것이다.
때문에 누군가가 기적을 체험했다면 그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네가 믿음이 좋으니까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너에게 주셨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 기적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함으로써 나를 주께로 이끌어 가시고자 하신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모든 시선을 두고 사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주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누군가를 고통으로 밀어 넣으시고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환경만을 보지 말고 우리의 믿음을 위해 주신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 확인해야 한다.
결론: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서 간섭하시는 일들과 여러 가지 부딪히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하시는가'라고 불평하고 낙심할 때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일을 맡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께 품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이 아니다. 물론 맡은 일은 있다. 그러나 그 일이라는 것이 우리가 부지런히 해서 뭔가를 이루는 일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아는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을 감사하고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이니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자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내 믿음의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다른 형제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된다.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위한 일로 부름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문에서 보여주는 베드로의 입장이고 애니아와 도르가의 입장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는 우리를 고달프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욱더 깊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형제의 심령이 주를 향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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