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묵상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살기 - 갈라디아서 3장 6~14절

차작가 2024. 1. 6. 12:52

B. 성경 구절을 통한 주장—아브라함의 믿음 (3:6–18)

사도 바울은 앞에서 갈라디아 사람들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즉 그들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직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체험을 통해서 복음을 설명했다. 이제 바울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제 본문 갈라디아서 3장 6절-14절을 통해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성경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그들이 이단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본문의 포인트는 1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되는데,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는 것이다”이다. 이 포인트가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지 이제 본문을 읽어가면서 알아보자.

성경: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절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8절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절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절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해석:

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구원은 믿음에 의하여 얻어진다. 이 믿음은 인격적이며, 내적이며, 영적인 사건이다. 이 믿음은 어떤 의식과 예식과 절차와 선행과 외적 행위와 아무 관계가 없다.

아브라함은 히브리 민족의 큰 조상이며, 유대신앙의 아버지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쁘게 받으셨다고 주장해 왔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로부터 그를 부르시고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그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할례를 명하셨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0 - 11).

할례는 언약의 상징이며 또 성결한 삶의 증거이다. 이 두 이야기(창세기 12:1-3과 창 17:10-11)를 근거로 유대주의자들은 땅의 모든 족속들이 아브라함 안에서 복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백성의 표징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하면서 반박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옳다 인정하셨다. 그리고 그 후 몇 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는 논증이다. 율법주의자들이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은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시간착오’이다. 시대적 순서가 바뀐 것이다.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옳다 인정받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옳다 인정받았고, 그 후에 언약과 성결의 상징으로서 할례를 받은 것임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에 관하여 설명할 때에도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롬 4:7-12)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런데 이 복이 할례를 받는 사람들, 즉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까? 혹은 무할례자들, 즉 율법을 지키지 아니한 사람들을 위한 것일까? 이 복이 율법과 관계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할례가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즉 율법을 지키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옳다 인정을 받은 사실을 할례를 통해서 다시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않고도, 즉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하나님에게 의롭다 인정을 받을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 되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은 또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의 조상도 되었다. 할례를 행하거나 행하지 않거나, 즉 율법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거나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을 받는다. (7절)

그렇기 때문에 어떤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는 설명은 옳지 않다. 십계명을 철저히 지켜야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십계명을 알지 못했다. 십계명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옳다 인정받는 복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레위기의 제사법이나 신명기의 율법을 거룩하게 지켜야 복을 받는다는 설명도 진리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레위기의 제사법과 신명기의 율법(십일조 법은 신명기 법전에 포함되어 있다. 참조 신명기 12장-14장) 레위기와 신명기가 있기 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이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옳다 인정을 받았다.

그렇다고 십계명이나 제사법이나 다른 율법들을 무시하라는 것은 아니다. 십계명과 다른 계명들은 이미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이미 죄 용서라는 무한한 복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구원과 사랑과 복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다. 십계명과 십일조 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복을 받은 사람이 십계명과 십일조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써 구원과 죄 용서의 복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의 자취이다. 이제 바울은 이 믿음의 자취가 모든 민족들,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믿음의 진리임을 밝히려 한다.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1) 율법을 지킨 자 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았던 유대인들에 잘못을 지적하는 말이다.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1) 하나님이 이방인들도 의로 여기실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정하셨다.

2)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이고 또한 복의 통로이다.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8-9절은 창세기 12장 3절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는데, 이 ‘복음’은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이다. 8절의 ‘모든 이방인’은 ‘모든 민족’이라고 읽는 것이 더 좋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시아 사람이나, 아프리카 사람이나,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믿어 구원과 죄 용서의 복을 받는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복을 얻은 것과 같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할례가 들어오기 전이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율법이 들어오기 전이었다.

그리고 이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이렇게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인용하면서 구약성경에서 복음에 대한 긍정적인 증거를 찾아 설명했다. 이제 율법으로부터 복음에 대한 부정적인 증거를 설명하려고 한다.

1.율법의 효과 (10-12)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주의자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주장이 어리석다고 말한다. 그렇게 주장하는 논리를 위하여 바울은 구약성경의 사건들이 일어난 순서를 제시한다. 아브라함은 할례에 대한 말씀을 듣기 14년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율법이 이 세상에 들어오기 500년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율법주의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지만, 바울은 율법 그 자체가 ‘저주의 시스템’인 것을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밝혀 말합니다. 그는 먼저 신명기 27장 26절을 인용하면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

여기에서, ‘모든 일’과 ‘항상’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일’은 ‘양적으로’ 모든 율법을 가리킨다. 하나도 예외 없이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항상’ 은 ‘시간적으로’ 항상 지켜야 함을 말한다. ‘한순간도 거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의미한다. ‘항상’이라는 표현의 이면에는 율법을 지키는 동기와 의도, 그리고 감정과 의지까지도 포함된다. 그래서 이 말씀은 전인격적으로, 전폭적으로, 율법의 조항들 가운데,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균형을 잃지 않고, 율법을 지켜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는 선고이다. 과연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9-10).

“그런즉 나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그렇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할 수도 없고,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도 불가능하다.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저주를 받은 것이다. 율법으로 신앙을 측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저주의 행위이다. 바울은 이렇게 율법의 저주성을 신명기 27장 26절을 인용하면서 밝혀 말한 후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한다.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합 2:4)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레 18:5)

“왜냐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합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레위기 18장 5절은 하박국 2장 4절과 어떤 관계인가? 쉽게 풀이하면, “율법을 행하라. 그리하면, 율법으로 살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율법을 행하면서 복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아! 율법을 계속 지키면서 사십시오. 그러면 율법이라는 저주의 시스템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12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율법의 기원은 불신앙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율법이 있게 된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복을 받으려고 하거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믿음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율법과 믿음은 그 기원이 다르다. 율법과 믿음은 그 본질이 다르다. 그래서 율법과 믿음은 서로 절충될 수도 없고, 서로 보완될 수도 없고, 서로 통합될 수도 없고, 서로 조화될 수도 없다.

2. 그리스도의 일하심(13~14)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신 이유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해 시기 위해서이다.

2) 신 21:23

‘속량’ 은 헬라 세계에서 노예의 자유를 사는 것, 즉 노예의 몸값을 치르고 그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어로는 redemption으로 번역하는데, 이 단어는 ‘다시 사다’ re-buy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옳다’고 인정하시어서, 즉 ‘무죄’하다고 인정하시어서, 그 사람을 죄의 노예로부터 풀어 주시기 위하여 몸값을 지불하셨다. 이 몸값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께서 몸값으로 지불되는 방법이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저주를 받으셨음을 의미한다. 죄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풀어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이 십자가의 진리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유대주의자들은 메시아가 저주를 받는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우리를 위하여!’ For us!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민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

1) 이는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것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한다는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2장 2절-3절을 그리스도 안에서 적용한 것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에게 약속하셨다.

첫째, “네가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둘째, “너의 이름을 크게 하겠다.”

셋째,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할 것이다. 땅의 모든 민족들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 복이다. 이 아브라함의 복은 모든 민족에까지 이른다. 아브라함의 복은 율법의 행위, 즉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복이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은 율법의 저주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적용:

나는 믿음으로 살고 있나? 나는 율법으로 사는 건 아닌가? 율법을 지키려면 완전하게 지켜라!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아무리 작은 율법일지라도 그것을 어기면 모든 율법을 어긴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오늘 말씀을 우리의 교회 생활과 신앙생활에 적용시켜 봐야 한다. 현재 교회에서 강조하는 몇 개의 율법만 잘 지킨다면 모든 율법을 다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일까?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결코 그럴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약 복을 받기 위하여 믿음을 지킨다고 말한다면 그 믿음이 율법이 된다. 그런 믿음은 율법의 행위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음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이다.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하여, 즉 잘 살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한다면, 성령님을 축복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수단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에 이러한 율법의 시스템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