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하갈과 사라 (여종과 자유의 여주인) (4:21–31)
2. 유업을 누릴 약속의 자녀 (27-31)
1. 질문: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21절)
2. 성경: 두 아들(22-23절)
3. 해석 : 두 언약(24-27절)
4. 적용 : 약속의 자녀로 살라!(4:28-5:1)
4: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말한다. 이 예루살렘은 자유자 즉 우리 어머니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과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다. 하늘에 있는 거룩한 산과 예루살렘이 자유 자이다. 종인 하갈은 율법의 상징이다. 종은 이 땅의 예루살렘을 말한다. 곧 유대주의이다. 그러니, 유대주의와 유대인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율법은 종의 자식인 것이다. 하지만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자유 자이니,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상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사는 자유인들이다. 시내산은 옛 언약이고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새 언약입니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시민이다. 이 시민은 종이 아니고 자유인으로 산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사야 54장 1절을 인용하면서 아이를 낳지 못해 슬퍼하는 여인과 아이를 낳아 즐거워하는 여인을 언급하고 있다. 원래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 민족에게 선포된 구원의 말씀이다.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아이를 낳지 못하여 부르짖은 여인과 비유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중에 아이를 많이 낳아 즐거워하게 될 것이라는 구원과 희망의 예언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이렇게 적용한다. 율법주의자들 즉 유대주의자들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며, 은혜와 자유를 알고 그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이를 많이 낳아 기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아들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두 어머니 사라와 하갈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까?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형제들아! 자매들아! - 이들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은 곧 우리들이다. 율법 아래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자유 안에서 살고자 하는 우리들, 바로 우리들이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육적, 혈통적 자손을 일컫지 않고, 영적, 초자연적 자손을 일컫는다. 우리가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이면 이삭과 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로 받을 첫째 대우는 핍박이다.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육체를 따라 난자 : 하갈이 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보고자 한 증표에 불과했던 것이다. 즉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 보고자 하는 열심을 가리켜서 육체를 따라 난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난 자: 반면에 이삭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이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히 전혀 개입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가 이삭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노력을 따라 나지 아니한 아들, 즉 인간의 혈통을 따라나지 아니한 아들이라는 것이다. 비록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났지만 아브라함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난자라고 일컫는 것이다. 천국은 이와 같이 성령을 따라난 자만이 들어간다고 한다.
아브라함같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육신은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육신이 죄인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 율법도 자신의 노력으로 지켜서 천국 가는 방편으로 삼아버렸던 것이다. 스스로 율법 아래 매인 자가 되어버렸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또 다른 법을 만들어내고 그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음의 증표를 찾고자 한다. 믿음이 있는 증거는 뭔가 달라지고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 그 약속만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었지 자신의 노력으로 약속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었던 것같이 믿음의 증거는 말씀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다. 하지만 내 열심을 가지고 스스로 믿음의 증표를 만들려고한다면 그것은 이스마엘을 만들어 내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을 따라 나게 하는 것은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니다. 목사가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교회는 누가종의 아들이고, 누가 자유자의 아들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면 된다. 성령을 따라난 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육신을 따라난 자는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세상을 살면서 종교적인 열심을 통해서 복을 얻어내고 천국에 가고자 힘을 쓰게 되는 것이다.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창세기 21장 10절과 12절을 보면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에게 말한다. “여종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 쫓아 주세요!” “이 여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똑같은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일로 인해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오직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아들만이 아브라함의 씨라 불려질 것이다. 유대주의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라 자유 안에 있는 우리 복음적 그리스도인들이 참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불려질 것이다. 율법 아래 사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유업을 받지 못한다. 오직 자유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자유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유업만 받을까? 자유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전인격적인 유업을 받는다.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교육과 문화, 예술과 도덕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분야에서 자유의 영과 자유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금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혼란과 갈등의 중심에는 자유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책임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현실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자유라는 단어를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가 무엇인지 아직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의 능력을 아직 잘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적 크리스천 심리학자인 스티픈 아터버언 Stephen Arterburn 이 건강한 신앙에 관한 책을 출판했는데, 그 제목이 “예수님은 더 많이, 종교는 더 적게”(“More Jesus, Less Religion") 이다. 즉,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더 많이 강도하고, 종교성을 덜 강조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복음적이며 건강한 신앙임을 스티픈 아터버언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규칙으로부터 관계에로 옮기기”“(”Moving from Rules to Relationship”)이다. 법칙성, 규칙성, 원칙주의 등을 많이 강조하면 할수록 해로운 신앙이고, 관계를 많이 강조하면 할수록 건강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적 진리를 말할 때 사랑과 정의, 평화와 기쁨을 말한다. 이것은 모두 어떤 규칙들 Rules 이 아니고 관계들 Relationship이다. 교회는 규칙이 많고 법칙성을 논하고 법칙성을 지키려고 하는 교회가 아니고, 관계, 즉 사랑과 화평과 용납과 이해 등, 한 마디로 관계를 많이 갖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결론적으로 선언한다.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의 절정이다. 성경의 꽃이다. 성경이 금반지라면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그 반지에 박힌 보석과도 같다.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라! 흔들리지 말라!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 유혹에 빠지지 말라! 다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지 말라! 다시 율법과 종교의 종이 되지 말라!
거듭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21).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라디아서 1:9).
율법 아래 사는 것은 저주이며 죽음이다. 자유 안에 사는 것이 축복이며 생명이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연결고리이다. 이제까지 말한 내용의 결론이면서 앞으로 말할 내용의 시작이다. 다음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자유인이 자유인으로서 책임 있게 사는 법에 대하여 설명하게 될 것이다
적용: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21).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라디아서 1:9). 이 말씀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전부인 것 같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자유함이 있어야 한다. 우리 멋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말씀에 붙들려서 움직이고, 모든 일을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되어야 한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법에 의해서 하는 것은 우리를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할 뿐이다. 자유자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성령을 따라난 사람의 모습이다.
오늘날에도 율법적, 종교적 기독교인들, 즉 율법 아래에 살고자 하는 자들이 자유 안에 살고자 하는 복음적 그리스도인들을 놀리고 괴롭히고 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유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자유주의자라고 놀린다. 율법 아래 사는 자들은 은혜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무원칙 주의자 또는 방종 주의자라고 괴롭힌다. 우리가 약속의 자녀로 살 때 이러한 핍박과 조롱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약속의 자녀로 살 때는 약속의 유업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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