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배자

고린도전서 1장에서 10장 묵상

차작가 2025. 6. 5. 08:00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을 높이려는 성향을 지니고 있기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태도에는 반드시 자기희생이 따른다.

사도 바울의 자발적인 낮아짐은 복음으로만 사셨던 주님의 모습과 닮아 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편견과 무시를 감수해야 했고, 수많은 시험도 견뎌야 했다.

그가 전한 복음은 예수님처럼 값없이 전해진 것이 아니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의 고백은 오늘날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큰 울림을 주고 있다.

9: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의 삶은 당연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당연함을 거부한 삶이기도 했다.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연보마저도 기꺼이 포기한 채,

복음이 자신의 삶으로 인해 조금도 희석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나는 과연 단 한 번이라도 이런 태도로 살아본 적이 있었을까...

또, 바울처럼 자기희생적인 사역을 감당한 적이 있었는지...

그의 삶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자신은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되었다.

그 모든 이유는 단 하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사도 바울은 개인적인 유익이 아니라 오직 복음,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자신이 복음에 참여함의 기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희생, 자기 포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복음은,

자기희생이나 자기 포기보다도 훨씬 더 크고 깊은 기쁨이었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단 하나는 복음이었기에, 그는 그렇게 살 수 있었다.

헬라어 원문에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었다"라는 표현은

그가 복음에 참여함으로 누리는 깊은 기쁨을 이미 경험했기에 가능한 고백이었다.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사도 바울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 방향성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늘 조심했다.

유연하게 적응하는 태도가 자칫하면 복음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경주마처럼, 달음질하는 경주자같이 끝까지 자신을 점검하며 달렸던 것이다.

형식적인 사역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살폈던 것이다.

이 말씀에 깊이 공감했다.

왜냐하면 나 역시 늘 이러한 경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삶에 공감하고,

그 공감을 통해 복음으로 이어지길 소망하며 노력하지만,

때로는 공감에만 머물러 방향성을 잃고, 복음 없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복음에 참여하는 기쁨을 기대하기보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을 굳이 감수하고 싶지 않아

자기희생의 노력을 외면하는 나 자신을 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마치 합리적인 판단인 양 스스로를 설득하며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결론짓고 만다.

공감하며 다가가려는 마음은 있지만,

막상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순간엔 복음을 놓쳐버리는 나를 보게 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는 고백에서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이 마음에 다가가기 위해 내 약점과 강점을 모두 사용하되,

복음의 방향성은 곧 진리자체는 절대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걸 알았다.

공감과 낮아짐은 복음을 위해서라는 걸 잊지 않아야겠다.

즉, 공감을 위해 진리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

바울처럼 복음의 방향성을 끝까지 붙드는 절제가 나에게 필요하다.

이 균형을 고민하며 실천하려는 노력이 바로 복음에 참여하는 삶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