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빌립보서 3장 18~21절

차작가 2024. 4. 16. 11:00

18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절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중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공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보충 설명:

18절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을 교회를 향해서 하고 있는 말이다. 즉 빌립보 교회 안에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나 실상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마음 아픈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 스스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고 하나 실상은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그가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훼방하거나 사도 바울을 핍박하는 사람을 두고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원수 역시 스스로는 그리스도의 성도로 여기던 사람들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제가 이러한 말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자신을 ‘십자가의 원수’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분명히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로 여기고 그냥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냥 사람의 말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럼으로 인해서 자신이 십자가의 원수임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결국 그것으로 끝날 수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그러한 모습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19절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의 배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는 삶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켜 주는 것일 뿐,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필요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영광은 저희 부끄러움에 있고’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수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 귀한 것인가에 대한 가치관이 세상 사람들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뜻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시는 것을 오히려 선한 것으로 말하고 선하다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악한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말한다. 땅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은 하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은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다. 땅의 일은 곧 나의 일이고, 나의 계획과 소원을 이루는 일이다. 반면에 하늘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계획과 소원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신자라면 당연히 그 마음은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만 계시면 된다’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 α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자기 욕망이 하나님으로 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 신자에게는 십자가가 생명이며 모든 것이다.

십자가를 알고 믿는 것으로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얻은 자이다.

20~21절

본문의 내용은 현재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주어지고 될 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말하고 있다. 믿음은 된 일과 될 일에 대해 증거요 소망이다. 때문에 믿음이 있다는 것은 곧 현재가 아닌 미래에 대한 굳건한 소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교회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가 있음을 경고하면서 신자는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이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시민 다운 삶이 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즉 하늘나라의 시민이라는 신분에 맞는 삶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가 신자로서의 위치와 그 신분에 대해서 망각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한다면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삶은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몸은 그 누구의 몸이라 할지라도 ‘흙’에 지나지 않다. 천하에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흙에 지나지 않다. 결국 인간의 몸은 누구나 동일하게 낮은 몸이라는 것이다.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몸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똑같이 흙으로 지음 받았고 흙으로 돌아갈 인생이고, 인생의 끝남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 주권이 있다. 그러한 인간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이 곧 어리석은 것일 수밖에 없다.

 

본문에서의 ‘낮은 몸’은 땅에 속한 몸을 뜻한다. 흙으로 돌아갈 몸이며 썩어질 몸이다. 사망에 갇힌 몸이다. 이것이 본래 우리들의 몸이며 지금 우리 자신이 입고 있는 몸의 실체이다. 이 몸을 예수님이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신다고 한다. 이 영광의 몸은 사망에 갇힌 자의 몸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늘에 앉으신 분의 몸을 말한다.

우리의 썩어질 몸을 입고서는 갈 수 없는 곳이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영광의 몸으로 바꾸어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자에게 약속되어 있는 놀라운 축복이다. 그러므로 천국에 대한 소망에서는 예수님보다 더 소중한 분은 우리에게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천국을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생각한다면 영광의 몸이든 예수님의 부활이든 그 모든 것은 가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에 소망을 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적용:

사역을 할 때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사건 중에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일을 나누려 한다.

오늘 적용에 아주 좋은 예가 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남편이 수요 성경 반에서 에베소서 강의를 할 때였다. 그날의 주제는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믿음으로,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때 한 장로님이 일어나셔서 화를 내시면서 " 사람이 믿는 것도 자기의 의지로 믿는 것이고 그 사람의 믿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시면서 계속 성경공부 시간에 설명을 드려도 반론을 제기하셔서 전체 공부시간이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따로 시간을 내서 대화를 하자고 해도 계속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드시는 것이었다. 목사가 성경을 교리에 맞게 바로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교인 중 단 한 명도 무례하게 행패까지 부리는 그 장로님을 제지하지 않았으며 교리에 맞게 가르치는 목사의 의견에도 지지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장로님의 가족이 교회에서 힘을 발휘하고 그 장로가 많은 헌금을 하고 교회를 이끌어 간다는 명목으로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노회에서 그 장로에게 장로 직함을 주기 위해 시험을 볼 때 백지를 내도 노회는 그 장로에게 장로 직분을 주었다. 이것이 나에겐 충격이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자칭 예수님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고 무엇인가?

두 번째 사건은 교회의 반주자가 졸업을 하고 교회를 떠나고 반주자가 없어서 우리 딸이 한동안 반주를 했었다. 반주자야 월 $500의 월급을 받고 일했지만 우리 딸은 그저 자원봉사로 반주를 했었다.

교회에 수련회가 있을 때에도 친구들은 아무도 따라가지 않는 수련회였지만 딸은 수련회에 와서도 반주로 섬겼었다.

그런데 수련회 중에 세 권사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 교인 중에 수언이가 반주하는 것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셨다.

정말 그세 권사님이 올바른 신앙을 가졌더라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옳지 않다고 했어야 했고 오히려 수언이에게 수고했다고 용돈이라도 주는 게 마땅하다.

물론 딸도 우리도 그런 일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딸은 아빠가 힘드니깐 도왔을 뿐이었다.

그 세 권사님의 생각도 마찬가지였기에 은혜받는 수련회 기간에 우리의 마음을 흩으러 놓았던 것이다.

사탄의 일이기에 빨리 마음을 잡고 수련회에 집중했지만 그때 그분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 아무리 노력해도 저 눈빛으로 보겠구나... " 하는 절망감이 몰려왔었다. 그분들도 새벽예배 나오시고 매 예배에 출석하시고 기도하시고 " 주여!" 하며 외치신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삶을 보며 단 한 번도 그분들이 성령에 의해 살아간다는 생각을 해 보질 못했었다.

우린 이 생이 끝인 그런 삶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면 천국 소망을 가져야 하며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이 목회자를 칭찬하고 목회자의 자녀를 칭찬하면 그분들은 더 긴장하며 그 사이를 갈라 놓으려 했다. 함부로 그들의 신앙을 평가하진 못하지만 눈에 보이는 그분들의 삶은 허망하고 덧없는 나이 든 노인들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의 끝을 바라보는 나이에 과연 저렇게 사는 게 신앙을 떠나서 옳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했었다.

그러며 나는 어떻게 나이가 들고 늙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경에 말하는 노인에게 지혜를 배우라는 말을 현실에서 가능하게 살기 위해선 늘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믿는다 하면서 "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건 아닌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 천국의 소망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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