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빌립보서 4장 3~5절

차작가 2024. 4. 16. 11:03

3절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의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보충 설명:

4절

바울은 ‘주 안에서’라고 말한다. 즉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신자에게 기쁨이 되는 모든 조건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생각한다면 신자가 주님 안에 있는 것을 소망하지 않고 다른 세상의 것을 마음을 둔다면 그것은 이미 기쁨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삶의 특징을 말한다면 아마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핍박과 고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뻐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오기나 의지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당하는 핍박이나 고난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도의 기쁨은 무엇에 삶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이 아니다.

아무리 자신을 기분 좋게 하는 기쁨의 일이 있다 할지라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기쁨의 요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신자의 기쁨의 요소임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주 안에서의 기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을 뜻한다.

5절

‘관용’이란 모든 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한다는 의미가 관용이고, 종교적으로는 자신의 종교와 신앙 내용을 절대 시 하여 타 종교를 배제하지 않는 것을 관용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관용은 "주님의 관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레미야 13:14절을 보면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관용이란 말을 언급하는 데 이 구절에서 관용치 아니한다는 말은 심판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관용치 아니한다, 아끼지 아니한다는 말들이 마지막의 ‘멸하리라’는 말과 연결된 것을 볼 때 관용은 심판할 자를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본래 우리는 다 같이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용 아래 있는 신자는 그 누구도 죄에 대해서 떳떳한 자는 없다.

결국 신자의 관용은 하나님의 관용 아래 있는 믿음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너희 관용을 보이라’는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의 관용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진노의 대상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만의 고유 권리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온유하심으로써 피조물에 의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관용을 보이신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관용 아래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가 관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김으로 된다.

관용은 스스로 심판자가 되지 않고 모든 원수 갚음을 주님께 맡길 때 보일 수 있다. 우린 모두가 우리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고 항상 우리의 유익을 꾀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에서 바른 판단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항상 판단은 나를 중심으로 내려지기 때문ㅇ;다.

관용을 보이는 것은 주님이 행하신 바를 따라 행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라고 하신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생각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따라가는 사람이며 주님께 속한 자로 사는 것이다.

 

적용:

오늘은 관용에 대해서 그동안 많은 경험으로 안 것을 나누고자 한다.

목사 안수를 받고 첫 부임한 교회에서 부목사로서 섬기게 되었다.

교인들에게 사랑도 많이 받고 이전 교회에서 갈라지는 아픔을 경험한 탓에 담임 목사님도 성도님들도 마치 위로의 선물과도 같았다.

부목사라고 해서 담임 목사님께서 권위적으로 대하지도 않으셨고 사모라고 해서 아무것도 못하게 하는 그런 목사님도 아니셔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자유롭고 편안했었다.

동네 옆집 아저씨 같기도 하셨고 학교 교수님 같기도 하셔서 모르는 건 여쭙고 실수를 하더라도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부목사에게 강의할 기회나 설교할 기회도 많이 주셔서 실전에서의 연습도 많이 하게 해 주셔서 목회에 도움도 많이 되었었다.

그런데 담임 목사님이 한국에 학교 총장으로 나가시면서 후임 담임 목사님으로 오신 분부터가 문제였다. 공황장애 극복기에서 몇 차례 다룬 적이 있지만 그분 때문에 공황장애가 시작이 되었었다.

교회를 나오기 전 우리가 한 달 뒤 7월까지 비자 만료라는 걸 알고 바로 잘라 버리면 바로 한국으로 모든 걸 접고 나가야 되는 약점을 가지고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안 하면 그렇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도 일삼았었다. 교육자 회의 시간 함께 회의에 참석한 목사님이 "정 목사님이 그런 적 없습니다." 했다가 같이 핍박도 하기도 했었다.

마치 영화에서나 볼법한 그런 일을 교회에서 또 목사에게서 겪고 나니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고 전혀 예상한 상황이 아니라 대처하지 못해서 마음의 병이 들었던 것 같다.

조용히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또 힘이 없어서 또 싸워보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그냥 나왔었다.

그 슬픔이 가슴을 무너지게 했고 나는 걸음을 잘못 걸었었다.

어깨가 앞으로 굽어지고 심장이 아파서 걸음을 못 걸어서 한 계단 내려가다 주저 않고를 반복을 했었다.

그날 저녁 기도를 하는데 억울한 마음을 하나님께 부르짖고 나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간청을 했었다.

그가 한 모든 잘못을 내가 말하지 못했지만 지붕에서 외치는 소리같이 세상에 알려져 그 모든 잘못이 드러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었다.

그리고 기도한 대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를 해야 하지만 모든 잘못을 그대로 덮어야만 바른 신앙인이라고 또 관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잘못한 것은 나도 그 누구든 심판하신다.

그리고 심판하시는 분은 공의 로신 분이시다.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하고 하나님께 갚아달라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을 행한 사람을 함부로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말씀의 관용을 보여야 한다.

심판자의 자리를 내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기억하고 그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이 관용이다.

무조건적인 용서의 의미라 아니라는 의미이다. 무조건적 용서는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용 아래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나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인 사람이며 그분의 관용이 필요한 죄인다.

아직도 그분을 용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수 갚으심으로 인해 그 사건에 있어서 자유로워 진건 사실이다.

그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았기에 관계 회복은 안되었지만 굳이 만나고 싶지는 않다. 왜냐 면 나는 여전히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에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이 그 일을 간섭하시길 기도하고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셨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린 하나님이 온전히 주관하심을 믿을 때 진정한 용서와 관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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