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24: 믿음의 기도는 인내하는 것이다 - 누가복음 18장 1-8절

차작가 2023. 11. 8. 13:40

1절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절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절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되

4 절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절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절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 한 것을 들으라

7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본문:

1. 본문의 위치

17장에서 보면

20절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26절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절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절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5절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7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 오니 아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 노아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사건이다. 왜냐면 세상은 물로 심판을 받아서 모두 멸망했지만 노아의 가족은 구원받았고 소돔과 고모라는 불로 심판을 받았지만 롯의 가족은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데려감을 얻고 어떤 사람은 버려두는 것 또한 구원과 심판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믿음에 관한 가르침인 것이다.

그래서 18장 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 믿음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본문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기도에만 초점을 두고 해석한다. 그것은 본문의 비유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1절)라고 시작을 하고 있고, 내용 또한 한 과부가 자기의 원한을 풀기 위해 불의한 재판장이 괴로워할 정도로 찾아가 번거롭게 함으로써 결국 재판장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었다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 1절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7:25절에서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 역시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로부터 버림을 받는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 현실이 제자들을 낙심하게 할 수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인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 7-8절에서처럼 인자가 반드시 올 것이고 그때에 그 원한을 풀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2. 비유 설명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18: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18: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이 재판관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과부의 형편이 아니라 과부의 규칙적이고도 끊임없는 요청 때문이었다.

 

1) 과부

아무 희망도 힘도 없고 부당한 처분을 받은 그래서 이젠 오직 재판관에게만 희망이 있는 과부가 포기하지 않고 재판장을 찾아가는 것은 원한 때문이었다. 원한을 풀고 싶은 간절함이 강했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라고 해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과부는 사회적 약자에 속했기 때문에 가난했고 따라서 자신의 원한을 풀기 위해 재판장에게 뇌물을 줄 형편도 되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조차 무시하는 재판장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만약 과부에게 원한이 없었다면 재판장을 찾아갈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과부에게 있었던 원한이 과부로 하여금 재판장이 괴로워할 정도로 자주 찾아가게 한 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부는 자신이 재판장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원한이 더 컸기 때문이다. 원한을 풀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과 뜻이 있었고 그것이 재판장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까지 견디게 했던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재판장에게 무시당하는 과부의 형편을 생각해 보자. 과부는 자주 재판장을 찾아가서 자기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재판장은 얼마 동안 듣지 않았다. 이것이 장차 당시에 제자들과 오늘날 예수 믿는 성도들이 겪어야 할 세상의 실상인 것이다.

왜냐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가야 한다. 그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하나님이 마치 제자들을 무시하고 버려두신 것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고난과 핍박에서 건져주시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변화되어서 제자들을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현실이 바로 원한이 있는 과부가 불의한 재판장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를 생각해 보면, 이웃들은 노아를 이해하지 않았고 어리석은 자로만 여겼을 것이다. 그러한 이웃들에게 하나님은 아무런 징벌도 하지 않았다. 노아는 조롱 속에서 방주를 만들었을 뿐이고 이웃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자신들의 삶을 살았을 뿐이다.

 

◉ 원한을 풀어주심 ◉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의 원한을 어떻게 풀어 주셨을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으로 원한을 풀어주셨다. 세상이 조롱했던 방주가 생명이었음이 드러나는 심판을 통해서 풀어주신 것이다. 인자가 올 때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 인자가 오실 때 드러나는 것이고 그때가 곧 하나님이 성도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인자가 오실 그때를 기다리며 현실에 낙심하지 않는 것이 믿음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성도는 원한을 가진 과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은 복음을 알아주지도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었지만 세상일은 실패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조롱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 믿는 자에게는 이러한 원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고 하면 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게 되어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런데도 이런 원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무시하시는 것처럼 힘든 현실에 방치해 두고 계신다. 이것 때문에 성도가 낙심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자가 오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말씀이 성취된다는 믿음에 의한 기다림이다. 노아가 심판을 막연히 기다린 것이 아니라 말씀은 성취된다는 믿음으로 기다린 것과 같다.

항상 기도하라는 것도 이런 의미이다. 기도는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한다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늘 낙심하게 될 것이다. ‘기도해도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결국 형식만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처럼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위해 하는 것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인자가 오시는 것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항상 기도하라는 것은 인자의 오심을 믿는 믿음으로 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자기 백성의 원한을 반드시 풀어 주신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영광을 얻게 하고 힘을 갖게 하는 방식으로 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자를 세상에 다시 보내시는 것으로 풀어 주신다. 인자가 오시는 그때가 되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야말로 생명이며 가장 지혜로운 일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치 노아가 오직 방주만이 살길이라고 굳건히 믿은 그 믿음이 홍수로 인해 그 믿음이 드러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모든 눈물을 닦아 주리라고 하신 말씀. 계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어떤 눈물?

1) 한 영혼을 위해서 흘린 눈물: 믿지 않는 배우자를 위해서 흘린 눈물

2) 복음 때문에 흘린 눈물: 예수님만이 구주라고 외치며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만 전하면 온갖 핍박을 견디며 흘린 눈물.

 

결론:

성도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그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따라서 현재의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고 인자의 오심을 바라보는 믿음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자의 오심을 기다리는 믿음이 있는 성도의 기도와 믿음이 없는 사람의 기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믿음 없는 성도의 기도는 오직 이 세상에서의 편안함이다, 그러나 믿음 있는 성도의 기도는 핍박과 고난 가운에서 누리는 평안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믿음의 성도인가? 믿음의 가장 큰 증거는 인내하는 기도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사람을 예수님이 오실 때 찾기란 힘들다. 믿음의 기도는 인내하는 것임을 굳게 믿고 다시 오실 예수님만 의지하여 승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