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25: 돌아온 자의 믿음 - 누가복음 17장 11-19절

차작가 2023. 11. 8. 13:41

11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절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 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절 소리를 높여 가뢰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절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절 그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절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절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도입:

우리는 수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것 중에는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다. 당장 숨을 쉬게 해주는 공기가 그러하고, 물이 그러하고, 햇빛이 그렇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결코 자력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절감할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것에서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숨을 쉬게 하는 공기 하나에서까지 말이다. 나 같은 자가 숨을 쉬는 것까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마음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이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이기 때문에 은혜라는 생각이 특별히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와 공기처럼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은혜를 일반적인 은혜라고 구분하면서 그 가치를 하락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은혜를 받기 위해 기도원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단지 ‘공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햇빛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감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감사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하는 말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 136:7-9절을 보면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말한다.

이 내용처럼 신자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참된 감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지 ‘공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나 같은 자를 숨 쉬며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크고 영원하십니다’라는 고백이 참된 감사이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은 자리에서 나오는 감사는 다만 형식적인 것일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인자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본문의 내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문둥병이 나은 한 사람의 감사가 단지 육신의 나음을 입은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본문: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실 때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 이스라엘 지역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가장 남쪽은 유대 지역이었고 중간이 사마리아 지역이고 가장 북쪽이 갈릴리 지역이었다. 때문에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남쪽 유다로 가려면 사마리아인의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멀리 둘러서 남쪽으로 갔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 인을 순수한 유대인 혈통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방인처럼 취급했기 때문이다. 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유대인의 습성을 무시하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셨다.

그런데 그곳 한 마을에 들어가시자 문둥 병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들은 멀리 서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치는 상황에 접하게 되었다.

16절을 보면 문둥 병자 중 한 명은 사마리아 사람이다. 이처럼 한 명을 사마리아 사람으로 밝히고 18절에서 ‘이 이방인 외에는’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나머지 문둥 병자 아홉은 유대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들어간 마을은 유대인 문둥 병자와 사마리아 문둥 병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곳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마을에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구별이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아홉 명의 유대인 문둥 병자들이 사마리아 문둥 병자와 함께 예수님께 외쳤다는 것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게 되는 것은 ‘너와 나는 다르다’는 의식으로 인한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을 차별한 것도 그러한 의식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러한 의식에 의해 나보다 작은 자로 여겨지는 누군가를 차별 하게 된다. 하지만 문둥 병자의 세계에서 그러한 차별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웃음거리일 수밖에 없다. 유대인 문둥 병자가 사마리아 문둥 병자를 향해서 ‘너는 나보다 더러운 자다’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든 사마리아 인이든 문둥병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그 마을에서 함께 하지 못하고 격리되어 생활해야 했다. 따라서 문둥 병자의 세계에서는 누구든 저주 받은 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고 자연히 차별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문둥병자의 마을에서는 유대인, 사마리아인이라는 차별이 없이 함께 할 수 있었다. 돈이 많다고 해도 저주 받은 문둥 병자고 높은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문둥병에 걸렸다면 저주 받은 자일뿐이고 격리되어야 했기에 세상의 기준 또한 통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 문둥 병자에게 없는 것 ◉

그렇다면 서로 차별하는 것이 없으니 그들은 세리와 죄인을 차별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고 구원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신을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으로 여기는 것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로 하늘이 기뻐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고 높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 받는 것이라는 말씀도 들었다. 부자는 지옥 가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는 이야기도 들었다. 또한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죄인가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은 문둥 병자의 마을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것들이다. 스스로를 저주 받은 자로 여기고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아가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으로 여길 리가 만무하다.

어쩌면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회개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자신을 옳다고 생각할 수도 없고 높임 받는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이들이야 말로 거지 나사로와 같은 고통 속에 살았고 작은 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것을 봐도 스스로를 예수님의 자비가 필요한 자로 여겼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구원 받은 자들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차별이 없으니 바리새인, 서기관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구원의 증표가 될까?

만약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로 여기지 않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 구원의 증표라면 구원은 결국 도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다만 좀 더 수준 높은 도덕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바로 여기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문둥병자의 마을에는 차별이 없다. 스스로를 저주 받은 죄인으로 여긴다. 자신을 불쌍한 자로 여기면서 예수님의 자비를 구한다. 우리는 이것을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

만약 누군가가 이러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그를 믿음이 있는 신자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도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믿음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착각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문둥 병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5장에도 예수님이 문둥 병자를 고쳐주신 내용이 있다. 그때는 손을 내밀어 문둥 병자의 몸에 대시고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므로 병이 나았고 그 후에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본문의 경우에는 환자의 몸에 손을 대지도 않고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씀도 없이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만 하신다. 또한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들은 병이 낫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에게로 향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순종의 믿음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15-19절까지의 말씀을 무시한다면 누가 봐도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으로 생각할 것이고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복을 받게 한다는 이야기 거리가 되는 것이다.

열 명의 문둥 병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제사장에게로 향했고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 것까지의 행동은 동일했다. 하지만 깨끗함을 받은 후의 행동은 전혀 달랐다. 열 명 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고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절)라고 말씀하신다.

아홉은 어디 있을까? 문둥 병자라는 저주에서 벗어났으니 크게 기뻐하면서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문둥 병자로 살았던 때를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고 예수님은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를 향해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서 드러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문둥병이 나은 것이 하나님의 기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기적을 체험했다는 것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수없이 체험했지만 결국 멸망을 초래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도 드러난 사실이다.

그러면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면 구원 받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문둥병자 아홉이 병이 나았으면서도 구원 받지 못한 것이 단지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겉으로만 보면 아홉 명의 문제는 감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면 돌아온 한 사람의 믿음은 감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시면서 나으면 돌아와 감사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보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그 행동에 잘못된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돌아오지 않은 것을 문제 삼으시면서 돌아온 것을 믿음으로 말씀하신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이 돌아오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돌아와 감사했다. 이것은 이 사람이 돌아온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순종의 차원이 아니라 그 내면에 예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어떤 힘이 있었음을 뜻한다. 그것을 믿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 이 이방인 외에는 ◉

왜 유대인은 돌아오지 않았고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왔는지 그 이유를 알기는 매우 힘들다. 다만 생각해 보면 사마리아 사람은 굳이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데 돌아왔고 오히려 돌아와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유대인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는 말씀으로 드러내고 있다.

아홉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병이 나은 것으로 예수님을 만난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병이 나은 것으로 만족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것은 문둥병이라는 고통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을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면서 ‘병이 나으면 예수님께 감사 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해서 믿음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한 의도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병이 나은 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병을 낫게 하신 분에게 마음을 두게 된 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문둥병이 나은 은혜를 받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은혜를 베푸신 분에게로 마음이 향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이 예수님께 향하게 것은 자신의 병 나음에서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봤기 때문이다. 믿음 있음과 없음의 구별은 바로 이것으로 드러난다. 유대인 문둥 병자들은 자신의 병 나음에서 하나님의 인자를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은혜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돌아가서 예물을 바치면서 자기 몸을 보여주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자를 보게 된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고 예수님에게 돌아가서 사례 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자신의 병 나음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를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신자이다. 신자는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함께 같은 해와 달을 보고 살아가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숨을 쉬며 살아가면서 비록 자신의 세상 일이 실패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는 차별이 없음을 발견하고 감사하게 된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 만물에 담겨 있는 하나님이 주신 인자하심은 외면해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감사 목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아홉 명의 문둥 병자들처럼 자신의 병 나음만 생각할 뿐 평생 문둥 병자로 살아가야 할 자신들에게 주어진 인자하심을 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결론:

우리에게 당연한 것은 없다. 그만큼 우리는 악한 존재일 뿐이고 무엇 하나 받아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물며 구원이라는 것이 웬 말일까? 영원한 저주가 합당한 우리들에게 생명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그런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자신에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감사거리를 챙기려고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자를 보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를 위한 길로 가게 될 뿐이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통해 증거 된 하나님의 인자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고 해서 모두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고 자부하지만 은총을 입었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있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참된 믿음은 은총이 주어진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것에 있음을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증거하시는 것이다.

믿음은 은총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베푸신 분에게 마음을 두는 것이다. 이것은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은총을 주신 분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마음이 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물론 감사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원하는 것을 얻은 만족으로 인한 반응일 뿐이지 은총을 베푸신 분의 자비와 사랑에 마음이 매임으로 인한 감사는 아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는 것도 실상은 죄인이라는 고백으로 참된 신자라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기 뜻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님에게 돌아오게 한 것은 자신을 깨끗게 한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에 마음이 붙들렸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이 그를 돌아오게 하고 감사하게 한 것이다.

이런 믿음을 소유해서 나의 구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구원될 수 없는 나를 깨끗하게 하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붙들린 마음으로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