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27: 변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 마태복음 18장 1-4

차작가 2023. 11. 9. 11:40

1절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절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절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도입:

(김연아 선수 이야기) 잘못된 결정 때문에 재심을 청원하자는 서명 운동까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세계 언론도 금메달을 강탈 당했다고 선전했었다. 홈팀 텃세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홈팀 텃세에 뺏겼구나 정도로 생각해서 서운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연아선수보다 2등급이 낮은 선수인데 같은 등급으로 취급해서 그렇게 점수 차가 났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화가 났었다. 올림픽 금메달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걸렸었다. 국가까지 개입해서 얻은 성과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세상은 이렇게 1등을 중요시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사건의 최대의 수혜자는 김연아 선수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경기 후 이만큼 관심을 받은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기 직후 미국 NBC 여론 조사 ‘당신은 이 결과에 동의 하십니까?’라는 설문 조사에 약 80% 이상이 동의 할 수 없다고 답함. ) 그리고 소트니코바선수는 금메달만 목에 걸었지 더 손해가 많았을 것이다. 만일 몰아 주기 심판이 아니라 정당하게 채점 받아서 근소한 차이로 2등을 했다면 아마도 ‘혜성처럼 나타난 소트니코바’로 기억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치 남의 금메달을 가로챈 사람으로 안 좋게 기억을 남겼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치명적인 누를 끼친 것으로 생각한다. 이 경우를 두고 욕심이 많으면 잃는 게 더 많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게 저만의 생각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생각이다. Business 하시는 분은 남들 보다 더 잘하려고 하고 학문하는 사람은 더 잘하려고 하고 운동하는 선수끼리도 경쟁할 수 밖에 없다.

본문:

1. 제자들도 마찬 가지로, 누가 큰 자인지를 놓고 다투던 중에 예수님께 천국에서 누가 큰 자입니까?라고 물어 본다.

1) 제자들이 누가 큰 자인지를 놓고 싸웠다는 것을 너무 쉽게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누가 큰 자인지를 놓고 싸웠다는 것은 누가 훌륭한 자인지를 겨뤘다는 것이고, 그건 누가 더 열심 있는 종교행위를 내어 놓고, 누가 더 열심 있는 선한 삶을 사는 자인지를 겨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누가 더 교회 일에 열심을 내고, 누가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취 물을 많이 내어 놓았는가를 자랑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2) 천국에서 ‘높은 자리’에 누가 앉는가에 대해 관심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천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2. 이런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데려 오셨다.

1) 3절처럼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2)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이 순수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3살 된 딸의 예)

청소를 다 끝내고 키친으로 들어가는데 이상하게 발에 뭔가가 자꾸 밝혔었다. 뭔가 싶어서 손으로 바닥을 쓸어보니 약간의 설탕이 바닥에 흘러 있었다. 순간 스쳐 가는 생각에 잘 살펴보니 수저가 담겨 있는 서랍이 살짝 열려 있고 열어 보니 숟가락 하나에 설탕이 조금 묻어 있었다. 수납장을 열어 보니 아니가 다를까 설탕 뚜껑도 조금 어설프게 닫혀 있었다. 추측하건 데 내가 욕실 청소 하고 있는 틈을 타서 요것이 몰래 서랍을 열고 숟가락을 꺼내서 먹고 자기 나름대로는 절대로 내가 모르겠지 하는 마음으로 모든 걸 원상 복귀 시켜 놓았던 것이다. 일단 바닥에 흘린 설탕을 닦아 내고 스푼도 깨끗하게 씻어서 넣어 두고 부엌에 앉아서 수언이를 불렀다. “ 수언이 설탕 먹었지” 하니깐 순간 당황하며 말을 못하고 머뭇 머뭇거리며 눈과 손을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엄마 눈을 봐봐” 하며 다그치니 수언이는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하는 표정으로 나름대로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천장을 바라봤다. 마치 세상에 엄마가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나는 수언이가 한 짓을 알고 있기에 수언이가 뭐라고 대답을 할지가 무척 궁금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눈만 멀뚱거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엄마에게 다 말해서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우리가 뭘 하는지.. 다 알고 계신단다. 그리고 엄마가 잘 못 본 것은 다 이야기해 주시기 때문에 엄마도 다 알게 되니깐.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고 이야기 했었다. 수언이는 순간적으로라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이런 잘못을 한다.

3) 천국은 어린아이처럼 누가 크고 작은가와 전혀 무관하게 사는 곳임을 예수님은 설명해 주시는 것이다. 크고 작음의 구별이 있는 곳은 타락한 이 세상이다. 여기가 바로 어른들의 세상인 것이다. 이겨야 하고, 크게 되어야 하고, 먼저 때려 눕혀야 하고, 먼저 성공해야 한다. 그게 어른들의 세상이다.

이런 사고 방식이 교회에 들어오면 누가 더 열심히 기도하는가? 누가 더 헌금을 많이 하는가? 누가 더 전도를 많이 하는가? 누가 더 착한 일을 많이 하는가? 누가 더 봉사를 많이 하는가? 등등.... 을 내세우며 교회에서도 상급 운운하는 것이다.

지금 제자들이 바로 그러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더 큰 자처럼 살고 있느냐를 따지고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가를 점치고 있는 것이다.

3. 계속해서 예수님은 4절처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1) 자신을 낮추는 자로 변해야(change)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

2) 사도 요한은 천국을 본 사람이다. 계 4:10-11에 보면 요한이 본 천국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천국은 이미 서로 낮추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

계 4:10-11절 말씀은 하늘 보좌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경이다.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하늘 보좌에서 어떤 일이 있는가 하면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분 앞에 엎드려서 자기 (면류) 관을 보좌에 드리고 있다. (면류) 관이란 신자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다. 그런데 그 상을 보좌 앞에 던지는 것이 하늘의 광경이다. 24장로는 택함 받은 백성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24장로들이 하늘에서 받은 면류관을 드리는 것은 면류관을 주신 분에게 도로 반납하는 것을 의미한다. 받은 면류관을 주신 분에게 반납하는 것, 이것이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왜 면류관을 반납하는 것일까? 11절에 보면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것이 반납의 이유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 같은 자가 면류관을 받기가 부끄럽다'라는 것이다. 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없기에 다시 반납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대표자라면 얼마든지 면류관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런데 왜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24장로는 영광과 존귀와 능력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합당한데 그 이유는 주께서 모든 만물을 지으셨고 주의 뜻대로 만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모든 만물을 지으셨고 주의 뜻대로 만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일은 주인이신 주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주님을 위해서 이 땅에서 수고하게 된 것도 다 주인 되신 주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요한을 통해서 하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은 이러한 하늘의 모습을 땅에 나타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24장로가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 일이라고 하면서 면류관을 반납하고 있다면, 성도 역시 땅에서부터 이미 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늘을 소유한 구원 받은 백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5:10절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는 고백을 한다. 자신이 모든 사도보다는 수고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하게 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고하게 된 것이지 내 힘으로 수고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이것이 하늘 영광을 본 성도들에게서만 보일 수 있는 현상이다.

4. 이 본문은 어떻게 이 땅에 살면서 실제로 낮아지게 되는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알려 준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질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천국 가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낮아 질 수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하심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차별이 있는 나라가 아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의로 천국에 온 자들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 것을 내어놓을 수 없는 곳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건설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운영이 되며, 하나님의 은혜로 통치가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들이 사는 것이다. 거기가 천국이다. 따라서 은혜의 나라인 천국에서는 절대 큰 자와 작은 자의 구별이 있을 수도 없고, 자기의 공로를 내세워 비교 상대적 우월감도 누릴 수없는 그런 곳이다. 한마디로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 합당한 대우를 요구하거나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만을 구하고 바라보며 사는 곳이 천국이다.

어린아이들 스스로가 뭔가를 이룰 수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한 천국의 현실을 다윗이 이렇게 노래했다. (시 131:1-2)

1절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 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 하나이다 2절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렇게 젖 뗀 아기가 아버지만을 의지하여 사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막 젖을 뗀 아기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선악을 구별하며, 아버지의 은혜로만 존재하고 살아가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아니 나중에는 젖 뗀 아기 정도가 아니라 어머니의 자궁 속의 아기가 되어 어머니의 생명선이 닿지 않으면 도저히 존재가 불가능한 완전한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5. 큰 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낮춘다면 그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니다. 진정한 겸손에는 그 어떤 의도도 담겨 있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린 아이들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 자신을 높이는 것 또한 모른다. 무엇이 교만이고 무엇이 겸손인가를 모른 채 행동한다. 어린아이는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있었다. 그러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도 어린아이들은 자신들이 낮은 자리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즉 어른은 큰 자고 어린 자신들은 낮은 자라는 기준이 없다. 어린아이에게 어른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지켜줄 대상일 뿐이다. 어른을 보면서 ‘누가 더 큰가’라는 경쟁을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이것을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론:

변화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크고자 하는 마음들이 변해야 한다. 아이들은 경쟁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관심이 없다. 이렇게 변해야 한다. 땅에서도 바로 천국에서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으로 변하여 천국을 있고 천국에서도 자라 여김을 받는다. 땅에서도 낮추는 삶을 살아 천국을 소유하며 살길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