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29:잘못된 열심은 하나님을 헛되이 예배한다. (마가복음 7:1-23 ,마 15장 1-20)
도입:
어떤 삶이 올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일까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올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하나요? 하나님 보실 때 인정받을 만한 올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나의 경배를 받으시고 있나?
본문:
1. 배경: 예수님이 게네사렛 ( 갈릴리 지역으로 가버나움 바로 아래 해변가에 위치한 곳)에 계실 때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왔다. 율법의 상징인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먼 곳까지 예수님께 모여들었다. 왜 모여들어 왔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들은 율법에 능통했고 특히 장로들의 전통에 능통했다. ‘장로들의 전통’이란 랍비들이 발전시킨 율법에 대한 세부 시행규칙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율법과 대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예) 출 16: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주므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이 내용은 안식일 전날에는 만나가 두 배로 내려오니 안식일 당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명령을 모든 것에 적용시킨다. 예를 들어, 집안에 있는 사람이 밖에 있는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줄 때(이것은 선한 행위이다) 집 안에 있는 사람의 손이 집 밖으로 나가서 줄 때는 계명을 어기게 되는 것이지만 만일에 밖에 있는 사람의 손이 집 안으로 들어와서 그 음식을 가져가면 어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장로들의 전통으로 만들어졌다. 나름대로 율법을 더 잘 지켜보려는 노력을 볼 수 있다.
예) 레 22:5 무릇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벌레에 접촉된 모든 사람과 무슨 부정이든지 사람을 더럽힐 만한 것에게 접촉된 자 22:6 곧 이런 것에 접촉된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니 그의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그 성물을 먹지 못할지며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부지중에라도 부정한 것에 손이 닿았을 수 있기 때문에 식사 전과 중과 후에 손을 씻었고, 심지어 식기들까지 부지런히 씻고 있었다. 이것은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거룩의 문제였다. 손을 씻고 음식을 먹어야 하나님 앞에서 정결과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는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더러워지는 것이고 부정한 존재가 되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다는 것은 그냥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2. 제자들의 행동 비판
예수님의 제자들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5절에서처럼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냐고’ 예수님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신학교 교수가 담배 피운다. 쉬는 시간에 몇몇 미국 신학생들과 함께 담배 피우는 모습은 문화충격이다.(작고한 유명 신학자는 골초였다고 한다. 미국 목사도 가끔 볼 수 있다. 우리 한국 전통 신앙으론 이해가 안 된다.
3. 이에 대해 9절처럼 말씀하시고 구체적인 예로 고르반 사상을 말씀하신다. (10-13)
1) 9절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이 말씀을 하심과 동시에 예수님은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는 그들의 잘못됨을 지적하신다.
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조상의 유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까지 폐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로, ‘고르반’제도(막 7:11)를 고발하셨다. 고르반 제도라는 것은 ‘어떤 물건을 하나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서약문’을 말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고르반 제도를 이용하여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 번째 5계명을 대수롭지 않게 범하고 있었다. 곧 부모를 섬기기 위해 당연히 써야 할 시간, 물질 등을 하나님께 이미 드린 것이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며 부모 봉양의 의무를 저버리고 있었다. 그들은 부모를 섬겨야 할 어떤 것이 ‘고르반’(korban) 곧 ‘하나님께 바친 물건’이라고 말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과일 밭이 있으면 그 소출의 일부를 부모에게 드려야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소출의 일부를 부모에게 드리는 것을 아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교묘하게 생각해 낸 방법이 그 과일 밭을 하나님께 바친 것 곧 ‘고르반’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 그 밭은 하나님께 바쳐진 성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소출로는 부모를 섬기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실제 이 고르반 맹세는 강제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고르반 된 물질의 일부만 성전에 바치거나 아예 바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부모에게 주어야 할 것을 고르반이라고 속이고 결국에는 성전에도 바치지 않는 악행을 저질렀다. 자신들의 잘못에 안전장치를 했다. 참 편리하게 법을 변경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앞세워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던 것이다.
3) 인간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은 고작 그 정도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율법을 잘 지켜서 보다 나은 사람으로 성숙되고 변화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의 잘못된 율법적 열심은 결국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쇼에 지나지 않는다.
4. 예수님의 책망
이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7: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라고 책망하신다.
위선적인 신앙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는 보지 못한 채 다만 장로의 전통을 따르면서 그것을 경건으로 착각하여 마치 참된 신앙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위선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기지만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을 향해 있다.
오늘 우리는 어떻나?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울까? 전통에 매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가 신앙이란 명목으로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이 전통이다. 교회에 모여서 예배할 때 정해진 순서와 짜인 틀에 따라 예배한다. 우리가 행하는 예배의 순서와 틀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에서 흘러 내려오게 된 전통일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해진 순서와 짜여진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전통적인 것을 무너뜨리라는 뜻이 아니다. 전통대로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이 신앙과 연관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예배를 어떤 순서에 의해서 어떻게 드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듣느냐가 중요하다.
또한 전통이 성경과 다를 때는 전통이 아닌 성경 말씀을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전통이기 때문에 없앨 수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보다 전통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전통을 행하면서 그것을 신앙의 시각으로 본다. 때문에 전통대로 행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바리새인, 서기관처럼 비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정작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감지하지 못한 채 전통을 붙들면서 경건하고 거룩한 신자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런 위선으로 자신을 가리기를 좋아하는 것이 인간이고, 오늘 우리들이다.
5.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 더 나아가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셨다. “ 7: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7: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즉 사람은 입에 들어가는 음식과 상관없이 본래부터 더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부정하게 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다.
인간의 더러움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함으로써 알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그것은 그 어떤 규례를 만들어 실천한다고 해도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이것을 안다면 믿음의 방향은 분명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신자가 식사 기도와 같은 신앙적 행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을 신앙으로 여기는 것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신앙적 행동을 신앙으로 여기게 되면 인간은 그 행위를 기준으로 자기 신앙을 확인하게 되고 타인을 비난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편에 서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더럽다고 하셨다. 어떻게 더러운지는 21-22절에 나와있습니다. 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
그들은 탐욕 때문에 – 부모를 봉양하지 않았다. 교만함 때문에 –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정죄했다. 결국 절대 변하지 않는 본질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도 본질적인 더러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헛되이 예배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 대부분의 성도들은 신앙으로 사는 것을 특정 행동을 실천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더 수준 높은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는 좀 더 세분화되고 나은 행동을 만들어 내어 실천하려고 하지만 성도가 신앙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부정함을 잊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게 하셨음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더러움의 상태에 있는 우리 자신이다. 그 더러움은 무엇으로도 씻기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에게 거룩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이러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분으로 예수님이 오셨다. 그분이 우리를 거룩의 자리에 옮겨 놓으셨다. 따라서 성도의 거룩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지 인간의 공로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전통과 규례의 실천 여부로 자신을 깨끗한 신자로 여기고 그것을 기준으로 타인을 비난한다면 하나님을 헛되이 예배하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자가 신앙으로 사는 것은 여러 가지 그럴듯한 법과 규례를 따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인간의 더러움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흘리신 그 은혜의 피가 생명임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믿음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는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헛되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려면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마음들(탐욕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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