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25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도입:
요즘 우리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살펴볼 때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쁜 생활도 한 요인이 되겠지만 그다지 예수를 믿는데 고난이 없어서 예수님의 재림을 그다지 기대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땅에서의 삶이 초대 교회에 비하면 그다지 힘들지 않기 때문에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토록 고대 했던 것처럼 고대 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면 이 땅에서 살기가 좋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이 분명히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전서에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살전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 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예수님은 이 땅에 처음에 오셨을 때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앞으로 두 번째 오실 때는 이 세상을 심판하려 오신다고 하셨다.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겐 심판 주가 되시지만 믿는 성도들에게 구세주가 되신다. 방금 읽은 성경 구절과 오늘 읽은 본문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겐 경고의 메시지이며 믿는 성도들에겐 위로가 되는 약속의 말씀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27절 말씀에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내용을 잘 이해해야 한다. 마치 행함이 있는 사람은 구원 받고 행함이 없는 사람은 심판 받는 다고 들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이미 심판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또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을 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심판의 여부는 믿음이 있는가 없는 가로 규정되는 것이지 행함에 따라 심판과 구원이 결정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행함은 없다.
그리고 재림 하실 예수님이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겐 심판자이지만 예수 믿는 성도들에겐 구세주 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행한 대로는 갚는다는 것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 대해 다르게 갚아 주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럼, 먼저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행한 대로 갚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본문:
1. 믿지 않는 자가 행한 것은 무엇인가?
1) 여기에 대한 답변은 누가복음 9:26 에 나와 있다.
누가복음 9:26 9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 ‘부끄러워 한 것’ 에 대해 예수님도 부끄럽게 여기심으로 갚아 주신다. 부끄럽게 여기다는 것은 ‘부인’의 뜻이다. 만일에 가족 중에 어떤 부끄러운 일로 매스컴을 탔다고 가정하면, 가족들은 부끄러워할 수 있다. 심하게 생각할 때는 내 가족이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본문에서 부끄럽게 여기다는 것은 이와 같다.
그래서 누가복음 12:8-9절에서
" 눅12: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12: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부끄럽다는 것은 부인한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겐 경고의 메시지가 된다.
혹시 세상에 나가 "나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게 부끄럽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예수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예수 믿지 않는 자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재림하셔서 그들을 심판 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3) 심판에 대한 성경 말씀
"로마서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
2.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행한 대로 갚는 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1) 갚는다 (아포디도미)는 뜻은 give, reward, recompense => 보답하다의 의미가 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쓰인 단어와 다르다. 심판의 의미가 아니다. 잘잘 못을 가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보답한다는 약속의 메시지이다.
2) 그럼, 행함의 기준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25절에서 말씀하신 것이 행함의 기준이 된다.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즉 예수님이 말씀한 행함은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한 것과, 주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구분된다. 다시 말해서 누가 자기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 살았고 누가 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로 살았는지 그 행함에 따라 갚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을 위해서 세상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버린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하늘의 왕권을 가지고 오셨을 때 생명으로 갚아주시고,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오직 자신을 위해 살면서 예수님을 버린 사람은 하늘의 생명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는 말씀에 해당된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찾는다고 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실천을 해야 할까요? 실천을 해야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하나? 기독교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는 나라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것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실천일까? 당연히 아니다. 이 말은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의미하기 보다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잃어도 좋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뜻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라면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고, 그것이 곧 예수님이 오셨을 때 생명을 얻는 행함에 해당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믿음은 성도의 삶에 분명 영향을 끼친다. 세상은 오직 자신을 위해 살아가지만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내가 손해를 본다고 해도 예수님이 증거 되는 길로 이끌어 가는 것으로 그 믿음이 증거 된다.
그래서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것은 우리가 행한 것을 하나하나 모아 두었다가 마지막 때 그에 따른 심판으로 갚으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행함에는 믿음에 의한 것도 있겠지만, 욕망에 의한 행함이 많다. 그렇다면 믿음에 의한 선한 행함과 욕망에 의한 악한 행함을 따로 분리해서 모아 두었다가 선은 선으로 갚으시고 악은 악으로 갚으신다는 것일까? 그러면 믿음에 의한 행함도 있고 욕망에 의한 악한 행함도 있을 때 어떻게 갚아야 할까? 이처럼 행함을 실천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가지의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것이다. 즉 자기 중심적이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것과 십자가의 희생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주를 좇는 길로 가게 한다.
이것이 행함이다.
영화 "변호인"은 민주화 저항을 막기 위해 죄 없는 학생들을 모진 고문을 통해 죄 있는 것처럼 사건을 조작한 것을 안 어떤 그 시대에 소위 잘나가는 변호사가 그들의 무죄를 변호하기 위해 자청해서 변호에 나서서 불의와 싸운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정의와 상식이 무너진 곳에서 거대한 권력 앞에서 정의는 살아있다는 신념 하나로 싸운다. 대기업에 스카웃 제의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재판을 변호 하기 위해 거절한다. 그리고 아무 힘없고 보상도 바랄 수 없는 한 학생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공권력이라는 최대의 권력에 맞서 싸운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행함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 사람도 정의를 위해 이렇게 자기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데 진리 되신 예수를 믿는 성도가 그 예수님을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 하지 못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성도라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맨 처음엔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말 때 누가 더 큰 자리를 차지 하는것에 더 관심이 많았었다. 그렇게 따르는 것은 사람의 일이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믿음이 그들을 다스렸을 때 자신들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실제로 목숨을 잃은 순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위해서 사는 인생길을 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욕망이 있고, 이 욕망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내 목숨을 살리는 길로 가게 한다.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든 살든 관심이 없고 오직 내가 사는 길에만 마음을 둔다. 자기 부인은커녕 나의 잘남과 나의 성공, 나의 이름을 드러내고 높이는 것을 더 원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이것을 우리 힘으로 어쩌지를 못한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해결 방법은 없다. 우리 힘으로 내 안에서 나를 장악하고 있는 욕망을 처리할 수는 없다. 문제는 욕망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우리가 부인해야 할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것을 탐욕, 욕망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어 하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성도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루는 믿음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믿음은 그 모든 것을 부인하게 된다. 기도할 때도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성도의 기도이다. 내가 살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내가 죽고 예수님의 이름이 증거 되고 예수님이 살기 위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고 믿음에 의해서 나타나는 행함이다.
결론:
자존심 체면 명예 같은 건 예수 안에서 다 부인되어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 안에서 나의 자존심이나 체면, 명예는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는 우리가 믿음이 있는 것이고, 그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자기 자존심을 위해 싸우지 않게 된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다. 자기 부인하며 자신은 죽어야 할 존재로 여기며 예수님만 증거 되길 마음에 둔다.
이것이 믿음에 의한 행함이다.
따라서 믿음과 행함은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행함이며 행함이 곧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는 말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믿음이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할 것이다.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행함이다. 이런 행함 있는 삶을 살아 장차 오실 예수님으로부터 진정한 상급을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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