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31: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천국 - 마태복음 22:1-14절

차작가 2023. 11. 10. 11:55

1절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절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절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절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절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10절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절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절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 이어 늘

13절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절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본문:

1. 천국은 잔치 중에서 혼인 잔치에 비유.

1) 4절:풍성, 기쁨이 넘치고 먹을 것이 풍성히 준비된 곳이다. 요즘 결혼식은 간단하게 하지만 유대 결혼식은 일주일 정도 했다고 한다. 일주일 간은 계속 음식이 나온다.

2) 천국은 이렇게 걱정도 없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일주일이 아니라 영원히)

2. 천국의 주인공은 아들이다. (예수님이 중심)

2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말씀한다. 천국은 잔치를 베푼 것인데 그 잔치는 임금을 위한 잔치가 아니라 아들을 위한 잔치였다. 아들의 혼인 잔치이다.

천국이 예수님 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섬겨 가지고는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와 동일하다. 흔히 사람들은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잘 섬기면 천국 갈 것으로 여겼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예수님을 믿는 것인 줄로 여겼던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섬겨서 천국을 간다면 바리새인들은 왜 못 가는 것일까?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일까? 그러면 하나님을 잘 섬긴 것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였다면 그 누구도 천국 가지 못한다는 결론이 된다.

그래서 천국은 예수님 중심이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길을 함께 가는 것을 '섬김'이다. 그래서 천국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 중심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오늘 비유에서 청함을 받았으나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참석자 않으며 오히려 임금이 보낸 종들을 죽인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고 말한다.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멸망의 원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천국이 아들 중심의 나라라는 것이다.

그 혼인 잔치에 참석한다는 것은 아들을 위하는 임금의 마음을 안다는 뜻이다. 즉 임금이 아들을 위하듯, 임금의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뜻은 주님을 믿는 것이다. 그것만이 하나님 마음을 기쁘시게 한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자만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 만약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면 먼저 주님께 나와야 한다. 주님을 주인으로 영접하고 주님이 가신 길을 함께 가야 한다. 나에게 손해라고 피해버리고, 어렵다고 거부하고, 힘들다고 그만둬 버린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임금의 마음이 아들을 향해 있는 이상 우리의 마음도 아들을 향해 있어야 한다.

3. 천국은 아무나 들어 갈 수 없다. 먼저, 초청을 받아야 한다.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아야 갈 수 있는 것처럼 초청을 받는 사람들에게 일단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3절에 보면, 임금이 아들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한다. 이 비유를 보면 먼저 임금에게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즉 임금의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에 미리 청첩장을 받은 것이다. 그것을 보면 이들은 어떤 조건과 자격을 갖춘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이 바로 유대인들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시고 언약을 세우시고 성전을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신 이 모든 것이 임금에게 청함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상상하지도 못한 아주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진다. 초청 받은 사람들이 핑계를 대고 안 오겠다는 것이다.

고대시대는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었다. 그러한 때에 동네에 잔치가 벌어진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아마 그 잔치에 가서 먹기 위해 며칠 전부터 굶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였다. 감히 임금의 초청을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오히려 임금에게 초청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만사를 제쳐두고 초청에 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대단한 잔치에로의 초대에 아무도 응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에게는 그 아들의 잔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잔치 보다는 자신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드는 일은 단시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우고 오랜 시간 준비를 해서 이루는 일이다. 일단 밭을 사고 소를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장가들기 위해서도 역시 돈이 필요하다. 따라서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면 그 계획을 위해 오랜 시간 돈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드디어 계획을 이루었다면 마음이 많이 설렐 것이다. 때문에 잔치보다는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한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어서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를 걷어 차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다. 아니 어떤 사람이 임금의 종을 죽일 수 있을까? 그것도 자신에게 해를 끼친 것이 아니라 잔치에 오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종을 죽이고 모욕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정도로 그들은 아들의 혼인잔치에 무관심했고 싫어했다. 오직 자기 일이 중요했고 자기 일에 바빴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왕의 초청을 거절 할 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래서 앞서 말한 대로 우리의 상식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시 청함을 받은 사람에 해당되는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알아 가는데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임금의 초청을 거절하고 종까지 죽였다는 것은 임금을 철저히 무시했음을 뜻한다.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임금의 권세에 순종하기보다는 오직 자기를 위해 살았고 자기 길을 갔을 뿐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임금에게 청함을 받은 특별한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을 청해준 임금의 은혜를 생각했었다면 임금의 백성으로써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임금의 다스림으로 인해 주어진 복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일에 중요성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임금의 청함에 순종하는 것에 중요성을 두지 않았을까?

하지만 청함을 받은 유대인들은 그처럼 임금의 뜻과 마음을 헤아리며 임금의 권세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임금의 권세와 은혜를 무시하고 임금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그 청함까지 거부하고 싫어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 천국은 하나님의 택하신 은혜로만 ◉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떨까? 하나님을 창조주로 섬기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경외하며 마지막 때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로 믿고 있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고 그 권위에 굴복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역시도 아들의 혼인잔치를 내 일보다는 덜 중요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내 일에 충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여해서 얻는 기쁨보다는 세상에서의 내 일을 통해서 얻어지는 기쁨을 더 누리고 싶어 한다. 이러한 우리 현실을 이 비유에서 엿볼 수 있다.

4. 천국 초청을 거부 한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천국에 초청 받는 경우가 생긴다(얼떨결에 초청 받은 사람들이 생긴다)

맨 처음 초청받았던 자들은 합당하지 않아서 임금은 다시 종들에게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9절)고 지시하고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하게 된다.

그건 이 세상에서의 선함과 악함이 혼인잔치의 참석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오직 강권하여 초청을 받은, 왕의 편애를 받은 정해진 자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니까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런 잔치를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초대 받았다. 우리도 구원에 대한 소망도 없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초청 받았다.

5. 천국에 초청 받는 사람이 다 천국에 들어 가는 사람이 아니라 택함 받은 사람만 들어 가게 된다.

임금이 초청되어 온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고 물어 보면서 대답이 없자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고 말하면서 14절처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라는 말씀으로 비유를 끝낸다. 결국 천국은 청함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자들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청함을 받았으되 자신의 일까지 버려둔 채 임금의 부름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청함을 받았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잔치 자리에 앉았다고 해도 예복을 입지 않으면 쫓겨나게 된다. 그러므로 천국은 오직 택함으로만 들어간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인 것이다.

택함으로만 들어간다는 말씀 앞에 인간의 의나 행함은 무력해 질 수밖에 없다. 택함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택함 받을 자격이 없는 자를 하나님이 택하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음을 생각한다면 택함은 인간의 모든 의와 행함을 내려놓게 하고 나 같은 자를 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마음을 두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택함 받은 자의 참된 모습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천국 백성임을 당연시 했다. 제사장과 장로와 같은 지도자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몰랐다. 자기 의로 똘똘 뭉쳤을 뿐 하나님의 은혜가 현재의 자신을 있게 했음에 대해서는 무시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세를 무시하고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의 일에 매어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결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길 바란다. 과연 천국이 우리에게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복종하고자 하는 뜻도 없이 다만 내 일에 매어 사는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이런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임금이 청하고 그 청함에 순종하여 들어가는 천국이 아니라 임금의 택함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천국은 강권해서 데려오는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들어가게 된다. 우리의 열심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 천국, 하나님 나라이다. 그런데 어떻게 나의 열심을 근거 삼아 더 큰 상을 받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것은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다.

나 같은 자를 잔치에 청하시고, 강권해서라도 그 자리에 앉게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을 복으로 여기며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

임금은 종들을 보내어서 길에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다. 그런데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다.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사환들에게 말하여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3절)고 한다. 예복이란 당시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주인이 내어주던 옷을 말한다. 따라서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주인이 베푼 잔치를 함께 기뻐하는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결국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아들에 대해서 무시하는 것이며, 아들을 위한 임금의 마음도 무시해 버렸다는 것을 말한다. 아들에게 나오긴 나왔지만 단지 구경하는 마음으로 나온 것이다.

예복을 입는다는 것은 주님을 중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께 나아와 복종하는 것을 말한다. 우린 다 같이 길에서 떠돌던 사람들이었는데 잔치에 부름을 입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께 순종하면서 오직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 그 사람들이 모인 것을 천국이라고 한다. '나는 잘하고 있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길을 보여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삶이 바로 요한 계시록에서 말하는 의의 옷이며, 그게 바로 요한이 말하는 착한 행실이다. 예수님 중심의 삶이 착한 행실이라는 것이다.

아무나 들어 갈 수 없는 천국은, 오직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만이 들어 갈 수 있다.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서 많은 착한 행실의 열매를 맺어 천국을 소유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