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32: 참된 신앙인가? 거짓 신앙인가? - 마태복음 25:31-46절

차작가 2023. 11. 10. 11:57

31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절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절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절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절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절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절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절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배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절 내가 주릴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절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위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절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절 저희는 영 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본문:

1. 비유를 드시는 이유는 다시 오실 때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목자들이 낮 동안 양과 염소를 치다가 밤이 되면 서로를 분리 한다. 그 이유는 염소는 추위에 약해서 밤에는 서로 붙어 있으려고 하고 반면에 양들은 추위에 강하니 붙어 있을 필요가 없어서 서로 떼어 분리한다. 예수님은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어떤 일을 하시려는 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하셨다.

2.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은 분리해서 상벌을 주신다.

예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하시는 일은 모든 민족을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양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신다. 그리고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34절처럼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하시고 반면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41절처럼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즉,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영생을 약속하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 형벌을 명하셨다.

3. 두 그룹이 운명이 다르게 된 이유는 차이점 때문이다.

이 사람들의 운명이 마지막에 갈리는 것은 양과 염소의 엄연한 차이였다. 양이 염소가 될 수 없고 염소가 양이 될 수 없는 차이점 때문이다. 처음부터 양은 양이고 염소는 염소였다.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드신 것은 차이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 양과 염소의 성격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니다. 즉, 양은 착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운 선한 행위를 해서 상을 받고 염소는 성격이 못돼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일부러 무시하는 듯한 선한 일을 하지 못한 관계로 벌을 받는 다는 도덕적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하신 비유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으로 부터 상이나 영생을 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4. 처음부터 양은 양이고 염소는 염소다

본문에 보면 심판은 구분의 의미를 갖고 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심판은 목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임을 말한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구분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는 의미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양은 신자를 가리키고 염소는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대개 보면 심판을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해서 신자는 천국으로 불신자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그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비유는 그러한 의미의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양과 염소를 구분하시는 것은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구분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목자 되신 예수님이 행하시는 심판이다.

◉ 하나님의 선택 ◉

34절에 보면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라고 말한다.

임금의 오른 편에 있는 자가 받을 복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이다. 창세로부터 예비된 복이라면 오른 편에 있는 양은 이미 창세로부터 복 받을 자로 선택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심판의 때에 있을 양과 염소의 구분은 그 동안의 행실이나 신앙을 기준으로 해서 복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복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선택되어 있는 내용을 그대로 실행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사람들은 불만을 토로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창세전부터 오른편에 세움 받을 자로 선택된 자가 있고, 그가 어떻게 살았든 그 삶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택을 따라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된다면 인간에게 삶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굳이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항변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타당하다고 하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두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를 믿게 하여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예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시고 구원된 자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신다. 이것이 신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이다. 그리고 신자는 자신의 뜻과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이끌리는 삶을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양과 염소는 처음부터 양이고 염소이다. 염소가 최고 수준의 선행을 하고 많은 실천을 했다고 해도 양이 될 수가 없고 양이 잘못을 범한다고 해서 염소로 바뀔 수가 없다.

하지만 이것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니 구원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마음대로 살자’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양입니까? 아니면 염소입니까? 이것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으니까 양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이고 기대일 뿐이지 양과 염소의 구분은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된다.

그래서 본문의 비유는 ‘양은 이런 일을 한 사람이니까 우리도 양과 같은 일을 함으로써 양이 되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이다. 아버지께 복 받을 자로 택함 받은 신자의 사람됨이 그 행한 바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 지극히 작은 자 ◉

35,36절을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만 보면 양은 곧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든 사람이라는 것이 단순히 어려운 형편에 처한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40절에서 말하는 ‘지극히 작은 자’는 사회적 약자 계층의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위의 본문은 우리가 이해하는 선행과는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든 자를 예수님 자신으로 말씀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과 핍박의 길이다. 세상은 예수님을 환대하는데 예수님 스스로 고의로 그 같은 길을 간 것이 아니라 세상적 기준에서 볼 때 별 볼일 없는 자가 자신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을 고난과 핍박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참된 신앙의 길임을 알기에 그 길이 곧 믿음이 이끄는 길이기에 그 길로 인도 받으며 견디고 인내하기를 소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지극히 작은 자’는 복음으로 목말라 하며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가는 신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을 좇고 복음으로 살고자 하며 고난의 길을 가는 신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오른 편에 세움 받은 의인들은 자신들이 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7절)라고 의아해하며 자신들이 주를 위해 한 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세상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주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만났고 그들은 주님을 선대했다고 말씀하신다. 결국 주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 땅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모습이 무엇일까? 본문에 있는 대로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의 모습을 가진 자가 곧 주님의 모습을 가진 자였다.

의인들은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다. 단지 이들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자들, 주님의 고통에 함께 하는 자들을 만난 것이다. 주님 때문에 주리고, 주님 때문에 목마르고, 주님 때문에 나그네 되고, 주님 때문에 벗은 자가 되고, 주님 때문에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을 만난 것이다. 이들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그들과 함께 하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물을 주고, 입을 옷을 주는 마음이 곧 주님의 마음이고 그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 된 모습이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다.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가는 신자가 있을 때 그들과 함께 하고 영접하는 것은 복음을 아는 신자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의도적이 아니며 의식적이지도 않고 내 안에 자리한 복음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와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가 이렇게 했다’고 하실 때 ‘제가 언제 했습니까?’라는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왼편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44절)라고 항변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주를 위해 행한 것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자기들의 행함을 무시하고 부인하자 항변을 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자기 이름과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신앙은 참되다 할 수 없으며 자기 구원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거짓된 신앙으로 구별된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복음으로 인해 핍박을 받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형제에게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다. 자기 평안이 중요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부인당하는 것을 참지를 못한다.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중심으로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라는 말에 ‘우리가 언제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라며 자신들의 행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 받을 만한 곳에는 자선을 베푸는 척 했는지는 모르지만 주님을 위해서 목마르고 주리고 헐벗은 지극히 작은 자의 궁핍과 필요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작은 자들을 천히 여겼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모한다면 우리의 신자 됨은 지극히 작은 자, 즉 복음으로 인해 고난의 길을 가는 신자를 마음으로 영접하며 그 길에 함께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참된 신앙이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러한 신앙의 길로 인도하신다.

결론: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들을 우리 가운데 두셔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험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주위에 있는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일 3:17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요일 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자들은 우리 주위의 지극히 작은 자들의 어려움과 고통에 함께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작은 자들을 보면서 주님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양으로 구분하여 그 양들로 하여금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 결국엔 영생으로 이끄신다. 우리는 낙심하지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참된 신앙인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신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