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의 문이신 예수님
1) 양의 우리는 open 되어 있다. (주로 돌로 만들어짐)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은 목축을 하는 지역에 사나운 들짐승들이 출몰하기 때문에 동네마다 공동 양 우리를 지었다. 그리고 그 양 우리는 마을 공동 소유로 삼았다. 높이가 10에서 12피트 정도가 되었고 3미터가 넘는 꽤 높은 우리였다. 그렇게 양의 우리를 지어놓고 한 면으로 양이 들어가고 나가는 문을 만들었는데 그 양의 문에서는 목자나 문지기가 스스로 문이 되어 잠을 잤다고 한다. 즉 양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항상 목자나 문지기를 밟고 나가야 하는 형태였다. 우리 안의 양은 목자나 문지기를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그 공동 양 우리에는 온 마을의 양들을 다 넣어두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집 저 집의 양들이 서로 섞여서 밤을 지새우다가 아침에 목자가 와서 자기 양들을 부르면 그 목자의 양들이 정확하게 목자를 따라 나간다고 한다.
2) 열려 있는 곳에 앉아서 지키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
3) 예수님을 통과하면 안전(데후 3:3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하고 생명을 보호 받을 수 있다.
4) 이런 예수님이 구원의 통로이다. (9절)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롬 5: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되어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다는 것 자체도 우리 스스로 예수님에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우리들에게 찾아오심으로 되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인간의 공로는 철저하게 밀치면서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로만 되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 다른 종교와 기독교는 Do(행위)와 Done(다 이루었다)의 차이이다.
Do – 순례, 주문 외는 것, 종교적 훈련은 신에게 나아가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다.
Done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이룬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영적 반역자이며 천국에 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었고, 죄 사함과 영생을 은혜의 선물로 주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즉,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도달할 수 없음을 외치고 있다.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의가 될 수 없음을 외치는 것이 기독교이다. 이것을 벗어나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니다.
- 예수님만이 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아 즉, 구원자가 되시는 과학적 이유는
(구약성경에 메시아에 대한 구체적 예언이 약 60개 정도 있다. 이 중 48개를 이룰 수 있는 확률은 이 우주의 원자 100만의 제곱의 제곱의 제곱의 제곱의 원자 중에서 하나를 발견할 확률과 같다. 48개만 이룰 수 있는 것. 60개 정도는 상상이 안된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 마치 지문처럼)
2. 구원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
1)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분이고 또 양들의 생명을 얻게 하려고 목숨을 버리시는데 (예루살렘 입성 시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환영할 때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것은 다시 얻기 위한 것이며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이 문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세워진 문을 말한다. 그렇다면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은 '내가 구원에 참여하게 된 것에는 나의 공로는 전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내가 죄에서 깨끗함을 입었기 때문이다'라는 고백이 있는 것을 말한다.
-구원은 우리의 공로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의 공로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능력이고 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이 그 믿음을 바탕으로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를 보지 말고 살아가라는 의미다.
3. 양들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시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
1) 예수님을 통하면 꼴(먹을 것-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양들이 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 양들이 풍성한 풀을 먹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1) 불안하면 안 된다. 풀 먹을 때 주변에 적들이 없어야 한다. 즉 목자 되신 예수님이 지켜 주신다는 걸 믿으면 불안하지 않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불안하면 진정한 부자가 아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에서 지켜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불안감은 사라진다.
2) 건강해야 한다. 목자는 늘 양을 살핀다. 건강하지 않으면 산해진미가 소용 없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이제는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
-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예수님으로 들어가고 나갈 때 꼴을 얻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구원이 있고, 예수님에게서만 양식을 얻을 수가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살리는 양식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좇아오라고 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선한 목자인 당신을 좇아오면서 선한 목자의 삶을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선한 목자에 의해 각각 이름이 불려 진 우리 양들은 앞서 가는 그 선한 목자의 은혜를 깨닫고, 그 분의 삶을 본받으며,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선한 목자의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을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한 확고한 목적이 세워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어린 양이 자기를 어디로 이끌고 가든 열심히 불평하지 않고 따라가게 된다. 그래서 그렇게 주님을 좇아가던 다윗이 이런 시를 썼다.
시편 23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좋은 풀밭으로 가장 좋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데려 가셔서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신다. 그럼, 무엇이 풍성한 삶일까? 믿는 사람들에게는 풍성한 것이 세상에는 없다. 눈으로 보기에는 세상에 풍성한 것들이 많이 있다. 백화점에 가보면 좋은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안겨 주진 못한다. 세상의 부요함은 부차적인 것이지 주가 될 수는 없다. 진정으로 풍성한 것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신다. 믿음에 부요하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무한히 공급 받을 수가 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은혜에 대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14, 15절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4. 양들을 잘 아시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
1)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처럼 아신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는 것은 양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과 그 뜻이 어떠한가를 안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양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아는 예수님은 양에 대해서 일할 때 자신의 뜻대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도 예수님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다.
이처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과 그 뜻을 알고 행동하지만, 삯꾼은 양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결코 보지 않는다. 그러니 양을 자신의 이익의 수단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양의 주인은 목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양의 주인이 따로 있다고 할 때 목자는 양을 위해서 주인이 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목자가 양을 위해서 일한 그 대가는 누구에게서 받을까? 목자를 양에게 보낸 자는 양의 주인이기 때문에 목자는 일한 대가를 양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양의 주인에게서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양을 위해서 보냄을 받으셨다. 그리고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셨다. 예수님은 그 대가를 양인 우리에게서 받으셨을까? 우리에게 '목숨을 버려서 너희를 살려준 대가를 내놔라'라는 요구를 하셨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다만 '너희를 살린 예수님을 증거 하라'라는 것을 요구하실 뿐이었다.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은 아버지에 의해서 다시 살리심을 받고 하늘의 영광의 자리에 앉으심으로 그 대가를 받으셨다.
2) 항상 관심은 양들에게 있다. (날 버려 두지 않으신다)
14절에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라는 말을 하셨다. 이처럼 목자와 양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으로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아는 관계이다. 즉 내가 목자를 모른다면 나는 그 목자의 양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은 선한 목자다'로 끝날 것이 아니라 '나는 과연 선한 목자의 음성을 아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과연 그 분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 음성이 나의 목자이신 선한 목자의 음성임을 알고 그분을 따라가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선한 목자는 양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생명이라는 큰 이익을 주기 위해서 대신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이라고 했다. 띠라서 선한 목자의 양이 목자를 안다면 그것은 내 목자가 나에게 생명을 안겨주기 위해서 대신 자기 목숨을 버렸음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목자가 목숨을 버림으로써 안겨준 생명이라는 큰 이익은 세상에서는 절대로 얻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목자의 양이다. 이런 양이라면 과연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까? 이것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신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얻어진 생명이 세상에서 얻는 이익보다 더 큰 것임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익 되는 것으로 인해서 생명이라는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의 이익을 앞세우는 말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것이 예수님을 아는 자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우리의 목자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양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큰 손해의 길을 가신 분이다.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얻는 이익도 필요하다. 그러나 소중한 것은 예수님 때문에 얻은 이익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고 대신 우리에게 얻게 하신 그 생명이 얼마나 큰 이익인가를 알 때 세상의 이익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비록 세상에서의 이익이 줄어들고 손해가 되고 불리한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가기 위해서 목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종려주일에 사람들은 환호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그 위대한 사명을 완성시키기 위해 묵묵히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다.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유일한 구세주요 우리를 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내셔서 풍성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은혜에 감사하여 늘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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