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절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3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절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쁘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절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 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절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절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절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본문:
오늘 말씀 주제는 ‘참된 믿음’이다. 우리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믿음>
신자에게 있어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교회들이 신자에게 믿음을 강조한다. 뜨거운 믿음을 가지라고 하기도 하고,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한 믿음이 되라고도 한다.
그런데 신자가 이러한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아마 ‘믿음은 내 하기 나름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뜨거운 믿음이 되기 위해 기도원을 찾아가고 부흥회에 참석하기도 하며, 게으르지 않는 믿음이 되기 위해 교회 일에 열심을 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하늘로부터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우리에게 그 믿음을 잘 키워서 좋은 믿음으로 만들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치 못한 믿음을 주셨고, 완전치 못한 믿음을 완전한 믿음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들 소관이라는 의미가 돼 버린다.
위로부터 주어진 믿음은 완벽하다. 우리를 구원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 믿음이 신자를 장악하고 다스림으로써 구원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뜨거운 믿음을 가지라거나 믿음을 키우라는 말 등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무지의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신앙에 있어서 믿음이 중요한 것만큼 믿음에 대한 오해 또한 크다. 그 중에 하나가 믿음의 능력이다. 신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믿음이 능력이 있는 믿음이기를 원한다.
그런데 대개의 신자들이 생각하는 믿음의 능력은 뻔하다. 병이 낫고, 귀신들림 사람이 고침 받고 기도에 응답을 받는 그런 능력을 원한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능력을 체험했노라고 간증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간증을 듣고 있으면 아무런 능력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믿음이 초라하게만 여겨진다. 그래서 자기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믿음만 있으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믿음으로만 기도하면 해결될 것이고, 병이 들었다고 해도 믿음만 있으면 고침을 받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삶에 자신감이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일들이 믿음만 있으면 해결되는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은 일종의 ‘믿음 만능론’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 하나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일이 해결 돼 버리는 것이다. 현대 교회가 믿음을 거의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고 또 그런 잘못된 믿음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따르고 있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 나오면 ‘믿습니다’라는 말을 외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습니다’라고 외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 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내가 믿음을 보여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믿음을 보여주려고 애를 쓴다. 내 믿음을 보시고 나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속셈이다. (뿌리 깊은 이러한 것이 믿음에 대한 오해며 또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믿음을 더하소서 라고 말한 이유>
오늘 본문은 믿음을 말하기 전에 용서에 대해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것을 먼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실족(사람들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것. 예-말로 상처 주면 상처 준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죄를 짓게 된다.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도 죄이므로) 하게 만든다. 말로 상처 주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부부 사이에. 친구 사이에. 말 한마디. 절제 되지 못한 행동 하나에도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마음을 서운하게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도 하셨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예수님께 간구한 것은 자신들은 그렇게(7번씩 용서하는 것) 용서 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고 자신의 능력이 안되니깐 믿음을 통해서 극복해 보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제자들이 믿음을 더해 달라고 요구한 것은 더 큰 믿음을 받아서 예수님이 말씀한 용서를 실천하여 예수님의 제자다운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자가 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용서를 실천할 수 있다면 존경과 칭찬을 받는 인물로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제자들은 믿음을 용서를 실천하게 하는 능력으로 생각한 것이다.
지금도 이런 의도로 믿음을 구하는 사람이 많다. 하나님의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큰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큰 믿음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큰 일과 작은 일로 구분하는 것부터 세상 기준에 붙들려 있는 잘못된 생각임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요 6:29)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이미 참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가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의 크기에 따라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일도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믿음의 크기에 따라 하는 일도 다르다면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후의 제자들도 그 사역에 따라 믿음의 크기가 차별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열 두 제자보다 사도 바울이 가장 큰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높임 받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큰 믿음을 구한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해달라고 하는 것도 믿음에 대한 오해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1. 6절: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면 뽕나무를 바다에 심 기울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을 능력으로 이해하는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다.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단정하고 있다. 믿음이 있지만 더 큰 믿음을 받아서 예수님이 말씀한 것을 실천하여 제자답게 되 보겠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 부족해서 그러한 용서를 할 자신이 없다. 그러니 믿음을 더해주셔서 예수님이 말씀한 용서를 실천하게 해주십시오’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에게는 겨자씨만 한 믿음도 없다’는 의미로 6절의 말씀을 하신다.
따라서 6절의 말씀은 오늘 우리들도 믿음이 없는 자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다만 그 믿음을 뜨겁게 만들고 부지런한 믿음이 되게 하면 능력이 나타날 것으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참된 믿음에서 벗어난 생각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제자들은 뽕나무를 바다에 심기는 능력을 행했어야 한다. 그 일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땅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는 뽕나무가 ‘바다에 심기어라’는 나의 말에 순종하여 바다로 옮겨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이다. 그 같은 기적을 보일 수만 있다면 놀라운 능력을 가진 믿음의 사람으로 높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같은 놀라운 기적의 능력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믿음을 능력으로 이해하게 되면 제자들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는 사람이 된다. 이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과 같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믿음을 큰 일을 행하는 능력의 의미로 생각한다면 우리 역시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믿음의 능력이라고 하지만 믿음이 그러한 능력을 행하는 것이라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뽕나무를 바다에 심기는 능력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누구도 그러한 일을 할 수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은 믿음을 제자들이 생각하는 능력으로 주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믿음이 능력이라면 소위 믿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는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용서는 분명 불가능하다. 예수님에게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이러한 분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짓는다고 해도 회개하고 나올 때 단 한 번도 외면치 않으시고 용서하시는 분으로 오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 안에서 죄 없는 자로 여김 받는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나의 죄를 보게 하고 회개하게 하며 예수님의 용서를 구하는 자가 되게 하여 예수님의 용서 안에 있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큰 일을 행해서 나를 돋보이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2. 7-10절: 종의 비유
예수님은 이것을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말씀하신다. 종이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면 ‘와 앉아서 먹으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주인이 먹을 것을 준비하게 하고 주인이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게 한 후에 먹고 마시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주인이 명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감사하는 일은 없다고 말씀 하신다.
종이 밭에 나가서 종일 일을 했다고 해서 집에 돌아오면 주인에게 상을 받고 대접 받는 것이 아니다. 집에 돌아와도 여전히 주인을 위해 수종을 들고 일을 해야 한다. 주인을 위한 모든 일을 마친 후에야 먹고 마실 수 있다. 배고프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없다. 이렇게 온 종일 주인을 위해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으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없는 사람이 종이다.
당시 종은 주인의 소유이다. 그래서 종은 무슨 일을 했다고 해도 주인에게서 그 대가를 받을 수 없다. 예수님은 이러한 주인과 종의 관계를 들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야 할 생각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10절을 보면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신자는 무엇을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해야 할 것을 했을 뿐이라는 이 종의 자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무익한 종이라는 것은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종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무슨 일을 했다 하더라도 자신을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길 수 있는 것이 종의 자세이다. 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자신이 한 일로 인해 인정을 받고 높임 받고 싶어 한다. 인정받고 높임을 받음으로 자기 한 일에 대한 보람을 느낀다.
교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소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수고를 기억하시고 복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천국에 가게 되면 큰 상을 받을 것으로 여긴다. 물론 교회 안에서 교회 일로 수고한 분이 있으면 그 수고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은 필요하다.
다만 내 스스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무익한 종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 무익한 존재 ◉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쓸모없고 보잘 것 없는 무익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크고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간의 존재 가치가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한 어떤 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의 자세를 잊지 않는 신자라면 그 어떤 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세워 ‘나는 너와 다르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일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 것이고 항상 무익한 종의 자세로 하나님께 나올 것이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들에게 믿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향상시키는 도구였을 뿐이다. 믿음을 빙자해서 자신의 능력과 업적을 나타내는 일에 몰두했었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붙들고 있고 존재케 함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를 무익한 종의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우리의 능력으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믿음이지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믿음으로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결국 바리새인들처럼 믿음에 차별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것은 늘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살고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잊지 않기 때문에 ‘무익한 종’의 자세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일도 하나님의 능력이 하게 한 것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으로 자신을 믿음이 좋은 신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나는 죄인입니다’‘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고백조차도 말씀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고백을 했다고 해서 자신을 참된 신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고 뽕나무가 바다에 심겨지는 것과는 비할 수 없는 능력과 기적의 세계를 사는 것이다.
결론:
하나님의 믿음에 다스림을 받는 신자는 자기 행함을 바라보며 계산을 하지 않는다. 아예 자기 행함으로 여기지를 않는다.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복음을 증거하고 은혜를 나누고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내가 한다’는 생각이 없다. 다만 ‘나는 주인의 말씀에 순종되고 있을 뿐이고, 순종하게 되는 것도 믿음의 능력일 뿐이다’는 생각만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는 신자란 이런 사람이고, 인간을 이러한 신자로 바꾸어 놓는 것이야 말로 믿음의 능력이다. 이 능력은 뽕나무를 바다에 심기 우게 하고,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보다 더 위대하다. 산이 바다에 던져지는 능력을 체험했다고 해서 인간이 달라지고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크고 놀라운 능력과 기적은 자기만을 바라보는 완악한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 능력에 붙들려서 기적을 누리며 종으로서의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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