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입양(양자-sonship)에 대한 비유
1. 부마와 양자의 차이점
도입: 왕과 일꾼의 비유
어떤 나라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꾼이 있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이 일꾼에 대해서 그 나라의 임금이 그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 일 것이다. 행여 성은을 입어 일생에 단 한번 이라도 만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사건은 자기 인생의 최대의 사건이 될 것이고 자자손손에게 들려 줄 무용담이 될 것이다. 그런데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임금이 내시를 보내서 이 일꾼을 자신의 부마(사위)로 삼겠다는 교지를 전해 온다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이 일꾼은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일까? 대부분의 경우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일꾼이라는 자기 처지와 임금 사이의 격차를 생각한다면 그것을 놀림을 받은 것처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나를 놀리려고 장난친 것으로 생각한다) 일꾼의 입장에서 보면 이와 같은 어명을 농담으로 취급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틀림없이 임금은 자기를 놀리고 자신의 마을에서 조롱거리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볼 수 있다.
이 우화에서 이 시골뜨기 일꾼은 임금의 지위가 얼마나 높고 존귀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종종 임금을 알현할 수 있다는 것은 영광으로 생각할 만한 일이었는데 임금의 사위가 되다니. 임금의 사위가 되면 불편한 점과 좋은 점이 있다. 좋은 점은 일단 어떻게 하루를 살아야 할지를 걱정 하지 않은 정도이고 가끔씩은 임금의 후광을 입고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다. 반면에 불편함 점은 임금의 사위라는 지위에 걸맞게 행동거지에 주의를 해야 한다. 처음에야 불편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예전 생활과 별 다른 것 없이 친구들과도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삶을 보장된다.
그런데 만약 임금이 이 일꾼을 부마가 아닌 양자로 삼으려고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임금의 양자가 됨으로써 고결한 왕자의 신분으로의 격상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그 나라의 통치권을 물려 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될 수 있다.
비록 이 이야기는 하나의 예에 불과 하지만 실제로 일어 난 다면 얼마나 exiting 할까?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이와 비슷한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하고 계신다.
B. 양자에 대한 성경적 설명
1. 예수님의 약속: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여기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첫 째는 우리를 이 세상에 그냥 버려 두지 않고 늘 간섭하시며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겠다는 뜻도 있다.
두 번째는 재림 하시기 전에 우리를 반드시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하시겠다는 의지의 말씀이다.
1) 고아임: 예수님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고아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고아라는 자기인식이 전제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고 하신 말씀이 복음으로 다가 온다. 고아들이 불쌍한 이유는 아무도 그들의 인생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고아 같은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심지어는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분인데 말이다.
2) 입양 시 우리의 상태 – 롬 1:18(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 롬 5: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한마디로 양자로서 부적합한 사람이다. 이렇게 부족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 있었는데 에베소서 1:4-6을 보자.
엡 1:4-6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 엡 1:4-6
1) 입양은 하나님의 계획
우리가 아이를 낳으면 키워 보다가 맘에 들면 호적에 올리고, 맘에 안 들면 버리는 건 아니다. 일단 호적에 올리고 사람답게 키우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창세전에,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셔서 아들을 삼으시고 그 후부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고아인 우리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어떤 가치가 있거나 매력이 있어서 자녀 삼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다.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아직 죄의 몸이다. 그래서 이렇게 죄에게 시달리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으면 너무나 괴롭다. 그래서 하루속히 이 죄의 몸을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단, 죄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해 본 사람들에 한해서만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날이 기다림이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도 죄에 대해서 처절하게 고민하고 느끼셔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는 완성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을 중도에 포기하신다면 하나님이 법에 걸리는 것이다. 그런 논리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한 것이고 우리의 완성은 필연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다시 물러 버릴 수 없는 완전한 법적 제도적 안전장치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 그 분은 실패하거나 실수하실 수 없으신 분이다.
2) 양자의 중요성
4절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그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 정도가 아니라 어떤 법적인 장치까지 해 놓으셨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기 위해서라고 하면 혹자들이 죄가 없었던 아담으로의 회복인 것으로 착각들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죄가 없었던 아담도 able to sin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가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언제라도 또 죄를 짓고 타락을 한다. 우리는 그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도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실 것이라는 말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듯이 그 구절에 첨언을 한다. 그게 5절의 우리를 양자 삼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아들들이 되도록 양자로 받아들이기로 미리 정하셨다.
그러니까 우리를 택하시고 거룩하고 흠이 없게 만드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양자로 삼아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면 왜 ‘양자냐?’ 우리는 이 양자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주어진 그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이 전혀 알지 못하던 개념이요 용어인 양자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 양자는 로마법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왜냐하면 유대의 법적 체계에서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고 그러한 분위기에서도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양자라는 개념으로 우리의 신분을 설명할 수 있었다.
로마에서는 오늘날처럼 부부가 아이를 갖기 위해서 입양하는 것과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입양 대상은 아이가 아닌 성인이었다. 누군가의 양자가 된다는 것은 법률적인 절차로 양자는 양부모의 모든 소유의 적법한 상속자가 될 뿐만 아니라 이 절차를 통하여 그 가문의 모든 특권과 책임을 함께 누리고 감당하게 되며, 그 가족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되었음을 법적으로 확증하는 전체적인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마시대에 양자가 된다는 것은 성공의 길로 여겨지기도 했다.
바울이 사용한 입양(휘오테시아)의 뜻은 한 가문에서 다른 가문으로 신분이 이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 이다. 입양의 과정은 그 가문의 수장 즉, 가장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는 것으로, 로마인의 관습에 따라 양부는 양자를 자기 가족의 새로운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주로 아들이 없는 황제나 귀족들이 친척이나 노예 중에서 양자로 삼을 사람을 데려와 직위와 재산을 물려주었다.
로마법에는 양자가 되면 양자가 된 사람이 그를 양자로 받아들인 사람의 이름을 따고 그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확보 할 수 있었다.
어떤 아이가 어떤 사람의 양자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그 아이는 아버지의 권한을 행사하게 되는 권한과 특권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적자(嫡子)들에게는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양자(養子)들에게는 반드시 재산을 물려주어야 했다. 그게 법이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러한 엄청난 신분으로 우리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법적 안전장치까지 동원하여 자녀를 삼으시려는 결연한 의지를 갖고 계심을 사도는 알리고 싶은 것이다.
말씀드린 대로 그 양자라는 것은 위치와 지위와 특권과 신분을 규정하는 법적인 용어이다.
입양의 목적
그 입양의 목적은 6절에서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 이다. 양자 된 우리들이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짜로 주신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은혜를 찬송하는 것이다.
입양하는데 성령께서 도우신다
롬 8:14-16 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5절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께 입양된 자격을 가지게 되었고 성령께서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소속이 벌써 하나님께로 변경되었음을 보증하신다. 이렇게 되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연합한 자들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다.
양자인 우리를 성령께서 하나님을 닮아 가도록 인도하신다.
양자는 친자식이 아닌데 법적으로 자식을 삼은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친자식에 비하여 부모를 닮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셔서 우리 속사람이 온전히 하나님을 닮아 가도록 이끄신다.
엡3: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부족한 우리를 성령께서 도우심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고 또 하나님을 닮아 가게 하신다.
우리를 입양하기 위해서 삼위의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로 받아 들이려는 계획을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양자의 자격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하셨다. 성령님은 양자로 택함 받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이끌고 계신다.
4. 이런 하나님이 양자 된 우리에게 기대를 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1) 얼마나 중요한 신분인지를 알라
앗수르 군사 십팔 만 오천 명을 단 칼에 없앨 수 있는 존재가 천사이다. 그런데 그 천사들이 우리를 수종을(隨從) 든다. 우리 안에는 이미 성령이 임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천사들은 우리를 섬기는, 우린 그런 신분의 소유자가 되었다.
2) 양자 신분에 맞는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아까 예화로 든 일꾼과 임금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만약 임금이 이 일꾼을 부마가 아닌 양자로 삼으려고 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양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기의 삶을 송두리째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될 수 있다. 물론 임금의 양자가 됨으로써 고결한 왕자의 신분으로의 격상되게 된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신분의 변화로 혹시 임금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앞설 것이다. 왕자가 되면 여태껏 살아 온 모든 삶을 포기하고 이젠 임금의 뜻대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앞설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이 앞서자 그 일꾼은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부탁했다.
‘왕자로 삼으시겠다는 어명은 저에게 과분하여 받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왕자가 되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 자명한데 바보가 아닌 이상 굳이 그렇게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차라리 정 맘에 드신다면 약간의 재물을 주시던지 아니면 친히 쓰신 휘호라도 주시면 가보로 간직하겠나이다’
이런 말을 들은 임금의 마음은 어떨까? 임금은 일꾼의 신분 위치에서 무엇인가 자랑할 만한 것을 주려는 게 아니다. 임금이 원하는 것은 이 일꾼의 존재와 삶의 질 자체가 총체적으로 변화되게 하는 그런 관계성을 그와 더불어 맺고자 하는 것이다. 임금이 바라는 것은 이 일꾼이 왕자라는 격상된 신분을 받아 들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임금에게 입양된다는 것은 전격적인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초대를 거절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간혹 느끼는 것 혹은 하나님이 우리의 신분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부적 같은 것을 하나 정도 가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신분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삶이며, 입양으로 말미암아 우리 정체성이 변화되는 것이다.
법적인 수준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은혜의 영광을 찬송)을 살도록 요구 받게 된다는 것이다. 양자 됨은 결국 삶과 존재를 변화시키는 차원에 까지 이르도록 한다. 우리가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함부로 살 수 없는 근거가 된다.
C. 양자로서 변화된 삶이란
1. 양자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 (롬 8:15)
1) 15절에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라는 말씀을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수 없는 것이 신자이다. '내가 이런 죄를 지었는데 혹시 지옥 가는 것은 아닌가?' 이런 두려움은 아버지의 사랑을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함께 한 모습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 어떤 죄와 허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핑계 삼아서 아들의 관계를 끊지 않는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낳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래서 우리의 허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안심하고 마음대로 죄짓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녀다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지키신다. 때로는 징계하시고 책망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만들어 가신다. 자녀가 아니라면 이것이 있을 수 없다. 히 12: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양자의 영을 받은 신자는 징계까지도 기뻐하게 된다.
아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묵인하시고 허허 웃으면서 넘어가신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아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다 들어주신다는 것으로도 생각하면 안 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닮은 자이다. 아버지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아들이지, 아들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일 처리를 해주는 아버지는 아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벗어날 때는 언제든지 책망하시고 징계하신다.
아버지를 부르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아들답게 살게 해달라고 불러야 한다.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거스르는 자신을 치면서 아버지를 부르게 된다. 그 때 하나님은 친 아버지가 되어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 모든 미래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확신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바로 양자의 영으로 인도 받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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