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22:신앙의 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 - 마태복음 21장 18-22절

차작가 2023. 11. 8. 13:36

18절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절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절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절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도입:

예전에 우리 교회 텃밭에 고추, 가지, 토마토, 깻잎을 심었었다. 아침마다 한일은 고추를 딴 일이었다.

아침마다 물을 주며 열매를 따는 기쁨은 아주 컸었다. 이처럼 아무 열매를 맺지 않는 텃밭은 기쁨을 주지 못한다.

본문:

1.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로 다가가셨다. 그 이유는 시장했기 때문이셨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2. 무화과 나무가 잎사귀가 있어서 열매를 기대하셨을 것이다.

1) 감람산 동편 보호구역에 가면 3월 말부터 4월 초에 잎이 나고 있는 무화과나무를 볼 수 있다. 이 무화과나무는 3월이면 작은 열매들을 맺었고, 4월이면 크고 무성한 잎들을 내었다. 이때에 맺힌 작은 열매들은 잎사귀보다 먼저 열리는 풋과일로, 대부분 먹을 수 없는 열매였다. 대부분의 경우에 무화과는 5-6월이 되야 먹을 수 있는 열매가 맺혔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열매가 맺히려면 앞으로 약 6-10주를 더 기다려야 했다(유월절은 4월 중순이었다. 마가는 이 때를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매우 시장하셨기 때문에 아직 익지 않은 풋과일이라도 찾으려고 그 곳에 가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무화과나무에는 어떤 풋열매도 달려있지 않았다. 그때에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이렇게 선언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3. 19절: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1) 잎사귀 밖에 찾지 못하시자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라고 저주하셨다. 그러자 곧 마르게 된다. 마가는 그 다음날 보니 말라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2) 우리 생각엔 너무 하지 않으신가? 아니 때가 아닌데 어떻게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느냐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예수라면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3) 그럼, 왜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의 말을 하시고 마르게 하셨을까? 먼저, 잎사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첫 열매가 없었다는 것은 두 번째로 열리는 정상적인 열매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4) 그 다음에 생각해 볼 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서 였다. 무화과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잎사귀는 그들의 종교적 행위를 상징한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가 결국에는 마르게 되었다는 것은 심판을 상징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능력이 없는. 신앙고백은 하지만 행함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실제로 AD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다)

5)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교훈이 된다. 예수님의 백성 된 조건은 바로 열매이다.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백성과 백성 아닌 자로 구분된다. 그리고 열매 있는 자만 구원되고 열매가 없는 자는 저주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열매를 구하는 것이다. 열매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열매가 없는 자를 저주하신다면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열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급한 일로 여기고 있을까?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행복하게 사는 일을 더 급한 일로 여기지 않나? 만약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때가 마지막 때가 아니고 종말의 때가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내 육신을 위해서 살아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예수님께서 열매를 찾고 계시는 때라면 나에게 예수님이 찾으시는 열매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지막 때를 믿는 자로서 당연한 행동이다.

6) 신자는 종말을 믿는다면 그에 따른 행동을 보여야만 하나? 모든 재산을 다 교회에 바치고, 예배당에서 날마다 기도하고 찬송만 부르고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찬송만 하고 있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심으로 종말을 믿고 알고 있는 신자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위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만약 이것을 무시해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살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나타내 보이지 못한 자는 결국 저주 아래로 들어가게 되고 말 것이다.

7) 오늘 본문의 말씀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지금 무화과 나무의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열매를 구하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무화과 나무가 바로 우리들이다.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보다 급한 문제는 없다.

8)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무엇일까?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열매는 전도해서 사람을 교회로 데려오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열매를 운운하고 있다. 예수님은 열매를 가지고 나무를 안다고 하셨는데 그 열매를 종교행위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열심 있는 전도, 열심 있는 봉사, 열심 있는 기도, 이러한 것들이 좋은 나무를 증명하는 열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무를 증명하는 열매가 내 편에서 열심만 있으면 된다면 열매가 뭐 그리고 심각한 문제일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무화과 나무가 말라 죽은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4. 20절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21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으면’라고 대답하셨다.

1) 마가복음에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대답하셨다. (Have faith in God) =>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가지라.

2) 스스로 열매 맺으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답변이 된다.

3) 열매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 열심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너희가 세상을 어떤 사고 방식으로 살아가느냐'이다. 결국 주님은 세상을 살아갈 때 주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열매를 원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주님의 백성이란 증거는 주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4) 열매는 단지 주님의 편에 서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는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자이다.

5) 하나님의 믿음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성도는 자기 행함을 바라보며 계산을 하지 않는다. 아예 자기 행함으로 여기지를 않는다.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복음을 증거하고 은혜를 나누고 봉사하고 헌신하면서 ‘내가 한다’는 생각이 없다. 다만 ‘나는 주인의 말씀에 순종되고 있을 뿐이고, 순종하게 되는 것도 믿음의 능력일 뿐이다’는 생각만 있을 뿐이다.

6) 신자가 주님의 편에 서서 주님의 사고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은 주님의 백성으로서 이제는 무화과 나무의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입장이 되어서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무화과 나무가 말라죽는 것이 심판을 말하듯 산을 바다에 빠뜨리는 것도 심판을 의미한다. 세상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 그 심판의 때에 저주가 아니라 구원으로 들어가는 자는 예수님이 원하신 열매가 있는 자이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세상을 내 편에 서서 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면 너희는 자연히 세상을 심판하는 열매를 맺게 된다'라는 것이다.

7) 신자가 세상을 심판하는 입장에서 산다는 것은 세상을 예수님 편에서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세상을 자주 아래 들어갈 자와 구원으로 들어갈 자로 나누어서 보신다. 마찬가지로 신자들도 세상을 살면서 항상 이런 시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세상의 좋은 것을 다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부러움의 마음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결국은 심판이다'라는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심판하고 있는 신자의 모습이다. 주님 편에서 사는 자는 자연히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산다면 남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부러워서 마음 상해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신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백성 된 모습이고, 이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결국 고통으로 얼룩지고, 수치와 멸시로 얼룩지고, 사람들이 멀리할 수밖에 없는 약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주님 편에 있는 자의 구별을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편에 서서 주님의 시각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는 십자가라는 그 자리가 너무나 편하고 기쁨의 자리가 되는 것이지만, 주님의 시각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향한 욕망으로 세상을 보는 자는 주님의 십자가가 너무나 추하고 약하게 보이기 때문에 자연히 회피하게 되기 때문이다.

8) 과연 세상을 심판하는 입장에서 살아갈까? 아니면 다른 세상 사람과 똑같이 자신의 행복과 미래의 안락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갈까? 예수님은 주님의 편에 서서 살기만을 원하신다. 그럴 때 열매는 자연히 맺어지게 된다. 직장을 다니든, 공부를 하든, 어떤 봉사를 하든 오직 주님의 편에 서서 주님의 입장에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가지고 믿음 생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론:

이제 우리에게 급한 문제가 무엇임을 알았을 것이다. 주님의 편에 서서 세상을 산다는 것은 우리의 결심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의 능력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열매가 맺어지는 삶을 위해서, 주님 편에 서서 주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구분해서 볼 수 있는 그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무엇이 필요한가를 진심으로 깨닫고 주님만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주께 나아오는 자를 주께서는 결코 외면치 않으신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도 우리에게 열매를 구하기 위해서 찾아오신다. 과연 우리에게 열매는 무엇일까? 주님의 편에 서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으면서 심판 받는 자리가 아니라 심판하는 자리에 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