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20:현실에 닥친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 - 마태복음 17장 1-8절, 누가복음 9:28-36절

차작가 2023. 11. 8. 13:32

 

1절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절 저희 앞에서 변형 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절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절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절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절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히신대

8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도입:

이 땅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는 것 같다. 왜냐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진리를 알기 때문에 이 땅에서 받는 고난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법을 행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자신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강요받을 때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알고 진리 되신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겐 당연히 고민이 되고

이슬람권이나 한두 권 지역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난이다. 일단 가족이나 공동체로부터 핍박받고 쫓겨나고 심지어는 살해 위협까지 당하기도 한다.

이렇게 크고 작은 일로 인하여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의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고난에 처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본문을 통해서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본문:

1. 이 본문의 전 배경:

본문 앞장 16장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1) 오병이어 기적으로 사람들이 따를 때 그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위기가 온다.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의 대답은 (그리시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 약속하신다.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다. (20)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심 22절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 마 16:23’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꾸짖는 베드로에게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도에 대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적잖은 실망감과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 부담감을 갖고 있는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 산(가이사라 빌립보 동쪽에 있는 헤르몬산으로 추정)으로 올라가신다.

첫 번째는 그들의 믿음을 더하여 주기 위해 변화산으로 데려가셨다.

3) 동시에 제자들에게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예수님은 십자가를 온전히 질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산에 오르신다.

누가 복음에는 기도하러 산에 가셨다고 표현했다.

4) 1절의 엿새 후 => 16: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하신 후 엿새 후를 말함.

2. 어떻게 제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시나?

예수님의 변화를 통해서 보여주신다.

1)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가운데 기꺼이 자신의 몸을 대속 제물로 드리기로 결단하셨다. 그 순간 예수님의 용모가 영광스럽게 변화된다. 입고 계시던 옷까지 희어져 광채가 났다. 하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시고자 했던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고 부활의 찬란한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

2) 십자가를 향한 순종은 영광스러운 변화로 나타났다.

3) 십자가 이후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것으로 패배가 아니요, 절망이 아니며, 끝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하늘의 존재로 변화하셔서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셨을까? 앞으로 그들에게 닥치게 될 하늘의 상(象)을 맺는 삶이 십자가와 자기 부인으로 고통스럽게 그들에게 닥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이 천국의 현실을 기억하고 견뎌내라는 의도에서 그들에게 하늘의 현실을 잠깐 보여주신 거다. 변화 산 사건은 주님께서 낙심해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심으로 그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사건이다.

4)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3.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습을 통해 =>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는 장면

1)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과 무엇을 대화했는가 기록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렇게 기록되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을 인정하지 아니하려 했다. 예수님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지금 그 천상의 비밀을 얘기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이루시는 것인가 바로 모세의 율법을 이룬단 말씀이다. 아마도 모세는 "주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많은 계명들은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계명으로 인해서는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만이 십자기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율법을 완성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했을 것이다. 예언의 성취는 십자가로 이룰 수 있다. 땅에 사는 인생들이 생각할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실패하는 것 같고 끝나는 것 같지만 천상에 있던 그 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길이 열리고 그 많은 예언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2) 베드로의 관점

모세와 엘리야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영웅과 같은 인물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영웅이며 엘리야는 초자연적 능력을 보여준 선지자의 대표이다. 엘리야의 마지막은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감으로써 능력에 있어서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런 위대한 인물을 목격함으로 여기가 좋사오니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한다고 고백했을 것이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보다는 모세와 엘리야처럼 영웅적인 인물이 되어서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이뤄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자로서의 삶이 힘겨울 것 같아서 거기에 머물고 싶었을 수도 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바로 영광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다른 말로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영광 속에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엘리야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십자가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받아 누리려 하던 유대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변화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그 엘리야가 벌써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그 제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리야가 왔다니요? 우리가 그토록 선망하던 엘리야가 정말 왔습니까?‘

3) 바른 관점

주님께서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그를 임의로 대우하였다’라고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성경은 ‘그 세 제자들이 그 엘리야가 세례요한인 줄 알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불 병거를 타고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헤롯에게 붙들려 참수를 당해 죽은 세례요한을 의미한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변화 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본 세 제자는 세상적인 믿음의 방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엘리야의 영광은 세례요한의 삶, 즉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모세는 어땠을까? 자신의 영광을 버린 삶이었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결국 이 두 사람은 이 땅에서의 영광보단 오히려 고난을 통해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을 말해 주고 있다.

4.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서 (5절)

1)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가장 확실한 위로이다.

2) 예수님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이라는 것이다.

5. 체험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 (14-20절)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귀신들린 아이 이야기이다. 예수님과 세 제자가 변화 산에서 내려왔더니 그 아래에서는 나머지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아이의 아비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 우리 아이를 좀 고쳐 주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에게 부탁했는데 그들이 고치지 못했습니다’하고 고했다.

그때 주님께서 탄식하시면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셨다. 제자들이 주님께 ‘어찌하여 우리는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여쭈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너희 믿음의 적은 연고니라’ 말씀하셨다.

여기서 믿음이 적다는 말은 ‘믿음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우리가 이 내용을 읽으면서 ‘믿음이 적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 그러니 어서 빨리 믿음을 키워서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발휘하는 참 신자가 되자’라고 결심을 한다면 성경을 완전히 거꾸로 보는 것이다. 지금 이 이야기는 변화 산과 이어지고 있다. 변화 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말씀을 듣고 내려온 세 제자는 세례 요한의 삶, 십자가의 삶이 엘리야의 영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자들은 여전히 능력을 행하고 힘을 보여주는 것이 믿음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신앙을 예수님의 죽으심이 아닌 능력과 자기 체험에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하늘의 영광을 체험 한 자는 능력을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찾고 체험하지 못한 자는 자신의 체험이나 능력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결론:

하나님이 세 명의 제자들에게 이런 신령한 광경을 허락하신 이유는 천국의 기쁨을 맛봄으로써 이 땅의 고난에도 낙망하지 말고 용기를 내라는 뜻이다. 특히 베드로는 이 사건을 벧후 1장에서 거론하면서 성도들에게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입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으로 인한 고난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며 십자가의 길이 지금은 고되 보여도 결국은 영광의 길임을 확신시켜 준다. 어려운 현실에 직면할 때마다 십자가만을 붙드는 삶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