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18:세상에서 소금으로 사는 것 - 마태복음 5장 13절

차작가 2023. 11. 8. 13:29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도입:

마가복음 9:49절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절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본문:

마 5:13절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산상수훈의 흐름 속에 있다. 그 말은 소금의 삶을 사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말씀이다.

산상설교의 맨 처음에 나오는 팔복은 현재 이 땅에 와 있는 천국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 천국을 영접한 천국 사람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것이 곧 산상설교의 내용이다. 즉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서 천국 백성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 신자들에게 천국 모습과 다른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여 우리의 죄악 됨을 깨닫고 온전히 천국에 거하고 있는 삶의 모습을 나타내기를 힘 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땅에 와 있는 천국을 영접한 자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산상설교는 이렇게 해야 천국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 사람이 된 자로서 천국 사람다운 모습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모습이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힘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흔히 소금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니까 세상의 썩어짐을 방지하는 역할을 신자가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 것이니까 신자는 세상에서 맛을 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 신자들은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가? 일단 주눅이 들게 된다. 그리고 마음에 중압감이 오게 된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할 텐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또 하지도 못하고 있는 자신 때문에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사실 신자가 어떤 역할을 한다고 해도 세상은 변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죄악된 땅이기 때문이다. 죄악된 땅이 인간이 뭔가 선한 일을 한다고 그것을 보고 변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세상이 다른 인간의 선한 행위를 보고 변화될 수 있다면, 썩어지는 것이 방지될 수 있다면 예수님은 괜히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것이다. 그런데도 신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라, 그것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고 이웃을 위해서 뭔가를 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냥 선포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신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하는가? 소금이라는 것은 분명히 세상에서 무엇인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그 역할이 무엇인가?

그 역할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소금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레 2:13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 지니라

1) 고대 근동 지방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고대시대 때 소금은 그 기능 중의 하나인 보존의 상징으로 쓰였다

2) 계약, 동맹 체결 시 소금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그 계약 혹은 동맹이 오랫동안 보존 될 것을 상징했다.

3) 그리고 소금으로 절여진 고기를 서로 먹으며 그 언약 관계를 확인했다

=> 따라서, 하나님께서 레 2:13절에서 처럼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 지니라’라고 명령하신 것은 ‘제물을 바칠 때 마다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약속을 절대로 어기지 않고 영원히 지키시겠다는 '언약’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언약을 소금의 언약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 이스라엘은 소금 언약으로 세상과 구별이 된다. 소금, 즉 하나님의 언약이 부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모형하고 있는 역사적 이스라엘에게 소금, 즉 소금 언약을 주셨다. 그런데 우리도 알다시피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뿌리는 하나님과 예수님 간의 피의 언약이다. 이 하나님의 언약이 소금 언약이다. 그러니까 당신의 피로, 죽어야 할 자를 구해내는 피의 언약, 그것이 소금 언약이다.

따라서 소금이란, 죽어야 할 자 대신에 제물에 뿌려지는 예수님의 피 이며, 그 예수님의 피는 곧 예수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제물에는 소금이 쳐지는데 그 소금은 피의 소금이요, 십자가의 소금이다. 소금과 제물은 그렇게 연합이 된다. 그렇게 그 소금이 쳐진 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소금 쳐진 제물을 먹고, 그 소금 쳐진 제물과 연합이 되어 소금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 즉 성도라는 말이다.

성도가, 이런 소금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짠맛을 잃은 소금이다. 그러나 신자가 보여야 할 천국 모습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좋은 것이 아니다. 신자가 보여야 할 천국 모습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알고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는 그런 모습을 통해서 천국을 보이는 것이다.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이 땅에 온 천국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 보이는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소금이란 소금의 형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짠맛이 중요한 것 같이 신자도 세상에서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느냐,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고 일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천국 모습을 보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가복음에도 소금의 언약이 언급되고 있다.

49절을 보면 지옥에 있는 죄인들에게 불 소금이 부어지고 있다. 그러고는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는 말씀을 하신다. 왜 지옥 이야기를 하시면서 갑자기 소금 이야기를 하실까? 하나님의 피의 언약은 그 언약이 체결이 됨과 동시에 인류를 둘로 갈라 버린다. 언약 안의 백성과 언약 밖의 사람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 반대편에 속한 자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피와 십자가는 그들의 악마 됨과 그들의 지옥행을 확정 짓는 확실한 저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불이 소금 불이다. 그 지옥불은 예수의 불이며, 성령의 불인 것이다. 그 은혜의 불이 성도들에게 임하면 구원의 불세례가 되지만, 지옥 갈 자들에게 임하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지옥불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은혜 밖의 세상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피의 언약, 즉 소금이 저주의 소금이 되는 것이고, 불의 소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의 소금이 발린 자들은 자신의 죄가 발각이 되고, 자신의 모자람이 폭로가 될 때 예수님의 은혜 뒤로 숨는다. 우리의 죄가 묻어서 잘라져 나가야 할 곳이 생길 때마다,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육신이 잘려 나간 것이다. 그게 피의 언약이다. 그게 소금 언약이다. 그것을 수긍하고 인정하는 자들이 성도이다. 그런데 지옥에 들어갈 자들은 절대 그 은혜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겐 화목이 있을 수 없다.

이 마가복음 9장의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전개되었을까?

9: 34절에 보면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큰 자인지를 놓고 다투고 있는 장면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야기이다. 그 모습이 바로 지옥 같은 세상의 실체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 향상과 자존심 챙기기를 위해서는 자신들의 팔 다리라도 자를 기세이다. 그들의 그 큰 자 경쟁은 그대로 지옥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들에게 불 소금이 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금 언약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가 폭로되고, 자신들의 연약함이 들킬 때마다 예수님의 팔 다리가 찍혀 내 던져졌다는 은혜와 긍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그들의 팔 다리는 찍혀 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이들에게 누가 큰 자인지가 뭐 그리 대단할까?

그렇게 마음속에 소금을 둔 이들이 큰 자 경쟁에서 벗어나 화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불 소금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이 난다.

50절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 하시니라 "

그 소금 언약을 제대로 알면, 세상의 힘의 경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그게 화목이다. 그런데 소금은 절대 짠 맛을 빼앗기지 않는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반드시 세상의 힘의 원리 속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그걸 자기 부인이라고 한다. 성도는 그렇게 소금 언약 속에서 예수님의 소금 되심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구원을 얻은 은혜의 소금들인 것이다. 그걸 아는 소금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소금으로 살게 될까? ‘나는 아니요, 아버지의 은혜만이 능력입니다’라는 삶을 몸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게 소금의 삶이다. 내가 착하게 살고, 내가 훌륭한 업적을 쌓고, 내 인격이 칭찬을 받아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소금이 아니라, 나는 자꾸 죽은 흙으로 낮아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창조의 착한 일을 하고 계신 예수만이 영광을 받는 삶이 소금의 삶이란 이다.

그래서 소금들은 힘겨운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그 고난을 어떻게 넉넉히 통과하는 지를 보여주는 삶을 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을 폭로당하는 현장에서도 절대 자존심이나 자신의 가치를 챙기려 부산을 떨거나, 율법과 도덕과 윤리 뒤로 숨지 않고 그 연약함을 덮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높인다. 그러니까 소금의 삶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부패성과 연약함을 폭로당하면서도 그 더러움을 덮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삶인 것이며, 힘겨운 고난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꿋꿋이 견디며 일어서는 예수의 증인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나는 부인 되고 진짜 소금인 예수가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이 은혜의 소금들의 삶인 것이다.

성도는 절대 자신이 영광을 취하는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가서는 안 된다. 그게 소금이 맛을 잃으면 내다 버린다는 말씀의 진의이다.

우리나라는 바닷물을 가두어 소금을 만든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소금의 2/3는 육지에서 생산되는 암염이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방에도 암염(巖鹽)이 많았다. 말이 바위이지 보통 흙보다 약간 더 단단한 푸석푸석한 돌덩어리에 소금기가 있어서 맛을 보면 약간 찝찝한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이런 흙덩이에 섞인 소금은 짠맛이 진하지 못하기에 아무런 쓸모가 없어서 다시 땅에 버리게 된다. 세상적인 불순물로 점철되어 예수를 드러내지 못하는 소금은 그 가치를 잃어 결국은 버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성도는 오히려 예수가 저주의 소금을 맞고 온전한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졌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 감추어지고 숨겨진 자로, 연약하고 무력한 자로 폭로되며, 그것을 덮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 분의 은혜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된다. 그게 소금의 삶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오늘 본문이 산상수훈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산상수훈은 엉뚱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미 이 세상에 와 있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이 세상 속에서 보이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의 내용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 임한 천국 백성들의 삶이 참으로 고단해 보인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예수 때문에 욕먹고, 악한 말을 듣는 자, 이게 다 이 세상에 임한 복 받은 천국 백성들의 삶이다. 그들의 삶을 이렇게 설명해 주신 후에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으로 살라’고 하셨다.

따라서 산상수훈의 그 내용들이 바로 소금의 삶이라는 말이다. 그 삶은 전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위해 내가 핍박을 받고 순종을 하는, 비움의 삶이다. ‘나’는 없습니다'그게 소금의 삶이란 이란 걸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