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리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절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루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절 과원 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절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 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도입:
사람들은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 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다. 사랑이 없는 무책임한 부모로 인해 아이들이 고난을 받고 불의한 경제(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인하여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음주운전자로 인하여 엉뚱한 사람이 고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꼭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고 하지는 않는다. 욥의 경우, 날 때부터 소경 된 자 경우. 그리고 본문의 나오는 사건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1) 1절을 보면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을 얘기하고 있다. 이것이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역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갈릴리 사람들은 반로마적인 성향이 강했는데 그런 갈릴리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그들을 잡아다 학살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피를 자기들의 신에게 제사할 때 바치던 제물의 피에 섞은 악행을 얘기한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2,3절)고 답하신다.
2) 그리고 이어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은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죽은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단호히 거부하신다.
주님은 그들의 죽음의 본질이 죄의 경중이나 많고 적음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힘주어 강조하셨다. 왜냐하면 죄라는 것은 많고 적음의 구분이나 크고 작음의 구분, 그리고 무겁고 가볍고의 구분에 의해 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이고(시 51) 그 죄는 다소 와 경중의 구분을 막론하고 모두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살면서 호리의 죄라도 지은 사람은 전부 사형이다. 그 말은 모든 인간은 자동적으로 다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사망에 처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자기들은 마치 그 지옥의 형벌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닥친 불행이나 비극을 죄와 결부시켜 갑론을박하는 것 자체가 무식한 짓이다. 주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대노하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5절 =>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망하지 않으려면 즉, 영적으로 죽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회개해야 하는가?
진정한 회개에 대해 설명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비유 하나를 더 보태시는데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이다.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무화과 나무 열매를 3년 동안 얻기를 원했지만 얻지 못하자 중요한 결단을 한다. 포도원 지기더러 무화과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한다. 무화과는 보통 2년 째 부터 열매를 얻는다고 한다. 어떤 무화과는 심은 지 1년도 안되어서 열매를 맺기도 한다. 그러므로 3년 동안 열매가 열리지 않는 것은 쓸모 없는 나무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주인이 볼 때 열매 없는 나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유익이 되지 못하므로 찍어 버리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당연한 주인의 결정에 포도원 지기가 일 년만 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 기회를 주면 두루 파고 거름을 주어서 열매를 맺게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고서도 만일 열매를 얻지 못하거든 그제야 찍어버리라고 간청한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포도원 지기는 예수님 그리고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한다. 주인이 무화과를 심은 이유는 열매를 얻기 위한 것인데 (앞의 두 가지 실제 벌어졌던 사건들의 핵심 내용이 회개와 관련 된 내용이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회개의 열매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찍힘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인 것이다.
이 비유에서 보면 무화과 나무 스스로는 3년이 지나도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래서 주인이 열매를 찍어 버리리라고 포도원 지기에게 말하자 포도원 지기가 하는 말이 1년만 시간을 달라는 것이다. 1년 동안 자신이 그 무화과 나무 주위를 두루 파고 또한 거름을 주어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이다.
포도원 지기가 이런 일들을 하겠다는 것은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해선 포도원 지기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 비유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회개의 열매이다. 그런데 그 회개의 열매는 스스로 맺을 수 없어서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우리 주위를 파시고 거름을 주신다. 나무가 잘 자라고 열매를 맺으려면 영양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 영양분을 예수님이 직접 주신다는 것이다.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이 필요하다. 3년 동안 무화과 나무 스스로 열매를 맺고자 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해서 이제는 찍혀 버려지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에 실망하고 있을 때 포도원 지기가 자신을 1년 동안 돌보겠다는 희망의 소리를 듣게 된다. (스스로 열매 맺으려는 기간을 예수님 없이 보낸 기간으로 포도원 지기가 돌보기 시작한 것을 예수님을 영접한 시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1년 동안 열심히 돌본 결과 열매를 맺게 되면 좋을 것이요 안 열리면 그 때가서 찍어버려도 안 늦다고 주인을 설득하고 있다. 안되면 버리면 된다는 소리 보다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소리이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회개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그럼 예수님이 어떻게 하심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을까? 우리는 포도원 지기이신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 주위를 둘러 파고 거름을 준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무화과의 열매는 포도원 지기가 주는 거름으로 부터 나오는데 이 거름이 어떤 것이냐가 중요하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행 38,39절을 보면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보면 회개, 세례, 죄 사함, 성령, 이 모두는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에게 하신 약속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회개, 죄 사함, 성령 받음, 이 모두는 인간의 결심이나 행동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에게 하나님이 이루신 축복인 것이다.
만약 사람이 스스로 하는 회개가 있다면 그것은 뉘우침이고 반성에 해당된다. 가룟 유다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가룟 유다가 회(悔)는 했지만 개(改)는 하지 않아서 지옥 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모두가 인간이 만들어 낸 그럴싸한 말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회개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회개할만한 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에게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회개는 과연 무엇일까? 회개는 단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한 말은 하나님이 하게 하시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는 마음이 예수님에게로 돌이켜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이 하게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회개는 곧 하나님이 신자에게 일으키신 기적이다.
말 4:5-6절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4: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선지 엘리야를 보내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하겠다는 것은 엘리야가 오기 전에 아비와 자녀의 상태는 단절의 관계였음을 의미한다. 아비 즉 하나님의 마음은 자녀를 향하지 않았고, 자녀 역시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은 상태로 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이키게 하려면 죄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 일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것이다. 그리고 자녀 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신 뒤에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때문에 회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이루시는 일이다.
신자로 하여금 자기 죄를 보게 하시고 사망에 갇힌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를 보게 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생명임을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예수님이 나에게 가장 존귀하신 분이라는 고백으로 살게 한다. 이것이 마음이 주께로 돌이킴을 받은 것이고 이것을 회개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마음에 찔림을 받고 ‘어찌할꼬’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회개하여 세례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한다. 그러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말을 문맥 그대로 이해하면 회개하면 성령 받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회개하면 성령도 받고 구원도 받는다는 오해를 한다.
하지만 회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가 예수님에게로 마음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도 예수님에게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 결국 회개는 믿음이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고, 믿음이 있는 것은 이미 성령 받은 상태를 뜻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이미 예수님의 용서의 능력 아래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회개해서 죄 사함 받고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과는 맞지 않는 모순과 혼란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창세전에 이미 택하셨다. 즉 신자는 세상에 날 때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해서 구원된 자로 계획되어 있는 것이다.
신자에게 회개는 그가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임을 증거하는 증거물이다. 세상에 두고 살던 마음을 예수님에게 두면서 세상의 것이 없어도 예수님이 함께 하심이 기쁨이 되는 회개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지금도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고 일하고 계심을 만방에 나타내고 증거하는 증거자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루시는 신자의 회개인 것이다.
그래서 회개는 단순히 감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우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눈물을 흘리고 울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회개의 증거로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회개는 자신이 가는 길이 틀렸음을 아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서의 출세와 성공이 곧 행복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악한 생각임을 깨닫고 생명이신 예수님에게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이다.
나는 죄가운데 있고, 죄를 이길 수가 없으며, 그래서 나를 죄에서 건지실 예수님만이 희망이고 의로움이며 가장 존귀한 분임을 믿는 것이 회개이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에게 돌이키는 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회개해야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어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신자의 회개가 곧 죄 사함을 얻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가 구원 받은 자라고 해도 회개는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수시로 세상에 끌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끄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것으로 낙을 누리는 것을 즐기며 살아간다. 이런 우리의 실체가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접할 때 생생하게 발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왜 예수님이 아니면 안되는지를 실감하면서 마음을 주께 두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 생활이다.
신자가 말씀으로 인해 깨닫는 것은 죄에 갇힌 우리에게 비취는 생명의 빛이다. 예수님의 용서와 자비하심이 죄인 된 자에게는 빛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용서로 인해서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이 역사하는 현장이고, 마음에 찔림을 받은 자에게 있는 회개이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매일 회개가 계속되게 한다. 이 회개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죄에 대해 찔림을 받게 하시고 예수님의 피의 용서가 영광의 빛이 됨을 깨닫게 하시는 예수님의 일로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회개하는 신자는 항상 예수님으로 인해 감사하게 된다.
신자는 자기 구원 문제에 매어 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신자는 구원의 문제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책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 있는 신자는 두려울 것이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살 뿐이다. 이런 삶이 바로 예수님이 거름을 주는 사람인 것이다.
결론: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과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을 말하면서 회개에 대해 말씀하신다. 즉 그 사건들은 우리에게서 회개를 이끌어 내기 위해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보게 하는 것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건 사고이다. ‘나는 저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니 복 받았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나도 저처럼 비참한 죽음에 처해져야 할 인간일 뿐이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는 필요 없다. 하지만 열매가 있다면 남겨 놓겠다는 것이 주인의 의도이다. 그리고 주인이 요구하는 열매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회개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맺기 위해 일하실까? 두루 파고 거름을 주면서 가꾸고 기다리는 것이 열매인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회개가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사람은 선한 사람, 악한 사람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죄인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갈릴리 사람의 죽음과 망대 사건과 같은 일을 통해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십자가의 은혜만 증거하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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