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절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절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절 또 가로되 내가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절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도입:
회사원 A 씨는 최근 동료들과 술을 마시다 로또 4장을 사서 한 장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4장은 동료들에게 한 장씩 나눠줬다. A 씨에게 로또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B 씨는 “공짜로 로또를 받았으니 당첨되면 2억을 주겠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B 씨가 정말 1등에 당첨됐다. B 씨는 당첨금 14억 원을 받았고, A 씨에게 8000만 원을 줬다. 이에 A 씨는 나머지 1억 2000만 원을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B 씨는 ‘서면에 의한 약정이 아니다’라면서 1억 2000만 원 지급을 거부해 두 사람은 팽팽히 맞섰다. 재판부는 A 씨의 손을 들어줬다.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말로 한 약속이라도 둘 사이에 ‘당첨금 분배 약정’ 맺은 것으로 봐야 한다"라며 “또 A 씨가 직접 로또를 구입해 B 씨에게 준 만큼, 당첨금에 대한 공헌도도 인정된다"라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B 씨는 항소를 했고 그들의 친구관계는 끝이 났다. 탐심이 부른 결과이다. 만약 로또에 당첨되지 않았다면 친구관계는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론:
오늘 본문에도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나온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유산 분배 문제로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온 목적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의 형이 유산을 독식하지 못하게 막고 자기 몫을 확보하기 위해 예수님의 권위를 빌리려는 것이다. 당시에는 랍비들이 일반 사람들의 재판관 역할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어찌 보면 아주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요청이었다. 히브리 사람들의 유산상속 관습은 신명기 21장에 따라 형이 3분의 2를 갖고 동생이 3분의 1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마도 형이 동생에게 줄 3분의 1마저도 착복을 한 것 같다. 동생으로서는 당연히 그것을 찾아오길 원했다. 그래서 훌륭한 랍비가 있다고 하기에 그 분께 찾아와서 ‘저분께 부탁을 하면 내 문제가 해결이 되겠구나’하는 마음에 부탁을 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그의 요구를 사양하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재산을 나누기 위해 세상에 오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사람들 간에 벌어지는 문제를 수습해 주시려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문의 사람처럼 예수님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려고 했다. 이런 자세에는 대부분 탐심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유산 분배라는 물질적인 탐심 때문에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에 대해 관심도 없고 오히려 예수님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려고 했다. 그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로 알았더라면 과연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을까? 이렇게 물질에 대한 탐심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아마도 이 사람은 유산 분배를 빨리 해결해서 자기가 안고 있는 어떤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심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재물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셨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바로 앞에 있는데 세상의 조그만 재물 욕심 때문에 영적인 눈이 가려 진짜 생명을 얻지 못할 수 있는 것이 안타까우셨다.
이렇게 계속 재물 문제에만 빠져 있으면 진짜 중요한 생명을 잃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탐심에 빠져 있는 한 부자 농부 이야기를 비유로 설명하신다. (16-20절)
어떤 부자가 밭에 소출이 기대 이상으로 풍성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지금 우리 집 곳간의 규모로는 이 소출을 다 담아 둘 수 없으니 지금 있는 곳간을 헐어버리고 더 큰 곳간을 지어 내 소유를 모두 담아 놓아야겠다. 내 영혼아 이제 노후 준비가 완벽하게 되었으니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러한 부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20절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주님은 풍성한 미래를 기뻐하고 있는 부자에게 ‘내가 네 영혼을 오늘 밤 찾는다면 그 저축해 놓은 것이 다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물으신다.
지금 주님은 인간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참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인데 그 생명은 돈이나 재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데 인간들은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소유의 많고 적음이나 인기나 명예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을 한다. 그 말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이 세상의 힘과 가치를 모으고 모으면 그것이 바로 생명이 된다는 억측을 하며 산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결국 자기의 소유나 명성이나 인기가 상실이 되면 금방 죽을 것 같은 비명을 지른다. 유명인들과 많은 재산가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렇게 현실의 ‘나’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미래의 ‘되고 싶은 나’라는 그림을 다 갖고 있다. 자신의 환경이 객관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 간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현실을 차로 말하면 코롤라로 인식을 하고 ‘되고 싶은 나’라는 자리에 벤츠를 올려놓는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전부 그 코롤라 같은 현실과 벤츠라는 이상 사이의 갭을 채우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여 살게 된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러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채우려 하는 모든 시도를 가리켜 ‘탐심’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채우려 하는 모든 인간들의 탐심은 반드시 죽음을 열매로 맺게 된다는 예를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보여주심으로 우리를 경각시키시고 당혹게 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미래의 희망을 위해 오늘을 산다. 사실 희망이라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과거와 현실의 ‘나’에 대한 불만족이 전제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전부 탐심 속에서 태어나 탐심을 부리다 탐심에 의해 죽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탐심이라는 것은 단순히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내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첫째 아담 속의 모든 인간들이 가진 죄 성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피조물이라는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절대 의존적인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첫째 아담 속의 모든 죄인들은 ‘나’라는 우상의 위상과 자랑을 위해 끊임없이 탐심을 부리며 살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채워지지 않는 탐심의 자리는 하나님이 빠져 나간 자리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이 그 자리에 들어앉게 되어도 계속해서 탐심이 솟게 되는 것이다. 모든 걸 다 소유했던 에덴동산 위의 아담이 선악과에 대한 탐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결국 에덴에서 추방이 되는 수모를 겪었던 것처럼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현실이 아무리 풍성하고 풍요하다 할지라도 그 탐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현실을 수긍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따라 자기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삶에 진노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 본문 21절이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자기를 위하여’ 이 어구가 오늘 본문의 핵심 어구이다. ‘자기를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쌓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며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지혜로운 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보면 그 이야기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이 된다.
(마 6:19~21) 19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20절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 질도 못 하느니라 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여기도 똑같이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행위가 어리석은 행위이고 하늘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라는 것이다. 그게 진짜 너희를 위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의 보화를 하늘에 쌓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하늘의 보화이신 예수를 더욱 더 굳게 믿고 의지해 가는 상태를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1) 그런데,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해 지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가 탐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탐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탐심은 그냥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해지면 탐심은 그 만큼 줄어든다는 것이다.
2) 그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해 지는 구체적인 방법은 어떤 것일까?
첫째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내 미래를 책임 질것이라는 믿음이다. 주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주어) 염려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런 맥락의 말씀이다. 내일의 ‘나’를 그리며 염려와 불안 속에 살지 말고 내일은 내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이다. 자꾸 하나님께 맡길수록 자기중심적인 탐심은 사라지게 된다.
둘째는 봉사다. 자신의 재물을 나누기란 쉽지 않다. 형제들과 유산을 나누는 문제로 다투기도 한다. 유산 상속 때문에 부모를 죽이는 일도 일어난다. 하물며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은 더 어렵다. 자기의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은 최고의 봉사이다. 비유에 나오는 부자 농부가 자신의 소출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아마도 하나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안락만을 위할 뿐 가난한 이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만 생각 할 뿐 남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면 할 수록 자기중심적인 탐심은 사라지게 된다.
셋째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다. 결국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보물을 쌓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면 할 수록 탐심은 점점 사라지게 되어있다.
결론:
복권 당첨된 사람은 돈에 대한 탐심으로 친구를 잃었다. 본문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유산 분배라는 물질적인 탐심 때문에 눈이 어두워 생명 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비유에 나오는 어떤 부자는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위한 물질에 대한 탐심으로 영혼이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이렇듯 탐심은 우리의 생명에 가장 위험한 적임을 알았다. 그리고 예수님을 탐심의 도구로 이용해서도 안된다. 생명은 소유의 넉넉한 데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자기 중심적인 탐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에 대한 부요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만 그 뜻을 두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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