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1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마태복음 7장 13-14절

차작가 2023. 11. 5. 10:47

13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절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도입:

그러면 이 본문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였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 이 본문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하여 이 본문의 문맥에서의 이 말씀의 위치와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사는 자의 삶은 어떤 특성이 있는지를 함께 보도록 합시다.

본문:

1. 산상보훈의 문맥에서의 본문의 위치

이 본문은 이 다섯 편의 설교 가운데 첫 번째 설교인 "산상보훈"의 문맥 가운데 있다. 산상보훈의 전체적인 주제는 천국 백성들이 어떤 사람이며,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에 대한 설교를 끝내신 이후에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 위로와 경고의 말씀을 아울러 하셨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선택과 위로와 경고가 다 포함되어 있다.

2.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의 의미

이 본문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라고 했다. 여기서 "좁은 문"이란 말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말일까? 좁은 문이 상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본문이 몇 군데 있다. 먼저 마태복음 7:14에 보면 이 문의 성격을 말씀해 주고 있는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 ՁՐՁՃՏՕՓՁ ՅՉՒ ՔՇՍ ՆՙՇՍ, that leads to life RSV)이라고 했다. '생명'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인데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3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 천국, 구원, 영생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기록된 누가복음 13:22-30에 보면 이 본문에서 "좁은 문"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주님께 나와서 질문을 한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누가복음13:23)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가 종합해 볼 때 좁은 문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총체적인 표현인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의미한다.

3.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의 삶의 특성

그런데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왜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이 뿐만 아니라 이 문으로 들어가는 길도 '협착하다'(ՔՅՈՋՉՌՌՅՍՇ, narrow)라고 하셨다. 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에 좁고 협착하다고 하셨을까? 이것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자의 삶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천국으로 들어가서 사는 자의 삶의 특성은 시작부터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도가 된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좁고 협착한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도가 되는 것은 넓고 편안한 길이며 모든 풍성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어렵고 힘든 생활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이해하고 있다. 오직 매력적이고 신기한 사건이 날마다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교제할 때 불치병이 치유되는 역사가 있기도 하고,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상황을 바꾸시기도 하고, 우리의 가는 길을 아름답게 인도해 가기도 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경험하는 많은 부분 가운데 일부분일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를 보면 하나님 나라의 여러 영역 가운데 한 부분만 보여주고 고통과 어려움과 갈등이 있는 다른 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우리 한국교회에 이상하게도 교회에 다니는 생활을 세상에서의 축복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수 잘 믿으면 건강해 지고, 돈을 많이 벌게 되고, 사회적인 지위가 올라가게 되고, 권력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것을 은연중에 가르친다. 이런 것을 많이 받아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는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는 이러한 점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좁고 험한 길이다. 주님은 이런 점에서 우리가 천국 백성이 걸어가야 할 길이 좁고 험하며 힘이 많이 드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천국 백성으로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을 걷는다면 참 어렵고 힘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찾는 사람이 적다.

천국 백성은 이 세상의 삶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마틴 로이드(D. M. Lloyd-Jones) 목사님은 여기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먼저 이 세상에서 자기를 독립된 인격으로 보기 시작한다. 전에는 그가 속해 있었던 군중 속에서 개성과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았지만 이제는 혼자 서 있다. 전에는 군중과 어울려 미친 듯이 달려갔지만 이제는 갑자기 정지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 번째 단계이다. 더 나아가서 그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군중들의 물결 속에서 한 순간 멈추어 서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다.

사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사는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떠나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의 상태에 있을 때 용서를 받은 사람이다. 이러한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보는 사람은 우리의 원수나 핍박하는 자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된다.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세상의 삶과 온전히 구별되고 유별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제자도의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라고 하는 책에서 성도의 신분에 따른 특권만을 누리려 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는 교회에 대하여 '값싼 은혜'를 받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하는 진리를 오용한 것이라고 했다. 천국 백성으로서 주님을 따를 때 치러야 할 대가가 있음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천국 백성이 좁은 문으로 들어 왔다면 좁고 험한 길, 군중 속에서 소외될 밖에 없는 길을 걸어야 한다. 이것이 천국 백성들이 치러야 할 비용(cost)이다.

4.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앞에 놓인 길이 좁은 문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크고 넓은 문도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실례는 매우 실제적이다. 한 쪽은 매우 넓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한 쪽은 길이 좁고 험하여 찾는 사람이 적다. 왜 우리에게 주님은 이 길을 보여주고 있을까? 주님이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이 문들로 들어가는 자들의 결과까지 너무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다니는 크고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고, 길이 좁아서 찾는 사람이 적은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앞에 놓여진 두 길이 있음을 말씀하심으로 어떤 선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앞에 있는 이 길들이 서로 비슷하다면 선택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두 길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어느 길로 가는 것이 안전하고 좋은 것인지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주님께서 크고 넓은 문과 좁은 문, 그리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이 두 문의 대비를 통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오너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그 길이 어렵고 힘들어도 생명으로 인도해 갈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미래의 운명을 생각해 보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어느 문으로 들어가서 사느냐에 따라 그 미래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주님과 영원토록 교제하게 되는 생명을 얻는 데 있다. 비록 좁은 문으로 들어와 안에서 사는 삶이 안락한 삶을 주지 않을는지는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크고 넓은 길이 아니기 때문에 외롭고 힘든 싸움을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좁은 길로 들어가서 영광의 면류관을 쓴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가리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러한 증인들을 언급하고 난 뒤에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자"(히 12:1)라고 한다. 지금도 이 길을 걷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들어선 이 좁고 험한 길을 함께 걸어가는 성도들과 손을 맞잡아야 한다.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 날이 가까이 옴을 볼수록 더욱 힘써야 한다(히 10:24-25).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크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은 많고, 좁고 협착한 길로 가는 사람은 적다고 하는 부분이다. 이 말씀을 가지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고 지옥에 들어갈 사람은 많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환상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받아 가게 될 완전한 하나님 날에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 두 개념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크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그 결국이 멸망이라고 하는 것이고, 비록 험하고 힘든 길이라고 할지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되면 주님과 영원히 교제하게 되는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문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이미 주님께서 어떤 문으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 결과까지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결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고 모든 진리를 상대화하여 다른 문으로 들어가도 나름대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두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모든 진리는 상대적일 뿐이지 절대 진리는 없다고 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문을 선택하여 어디에서 사느냐 하는 선택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나 그 결과는 이미 하나님이 정해 두셨다. 이러한 의미에서 상대적인 진리가 아니고 절대적인 진리이다. 하나님이 정해 두신 좁은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소망이 없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거기에 생명이 있다.

비록 이 문에 들어와서 사는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위로가 있다. 크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이 도무지 경험할 수 없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고 고상한 위로가 있다. 그러나 때로는 세상에서 이 위로를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완전하고 영원한 나라에서는 모든 것을 보상해 주실 것이다.

그 문으로 가는 길이 좁고 험하기 때문에 찾는 이가 적지만 여기에 생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