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11:염려하지 말라 - 마태복음 6장 25-33절

차작가 2023. 11. 3. 12:32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있느냐

28절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절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도입 :

원양어선에서 벌어진 실제 이야기이다. 처음 배를 탄 청년이 이방 저방 기웃거리다가 어느 방에 들어 갔는데 밖에서 문이 잠겼다. 안에서 열리지 않는 물고기를 보관하는 큰 냉장고였다. 추워지는 것을 느끼고 문을 두드리고 힘껏 소리를 질러댔지만 배의 엔진 소리 때문에 밖에선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다음 날 선원들이 그 청년을 찾다가 냉장방 안에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서 죽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방은 아직 냉동시설이 가동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방 보다 서늘하긴 했어도 죽을 정도로 춥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청년은 냉장방에 갇혀 있다는 생각 때문에 염려와 걱정이 가득했고 그 염려는 결국에는 그를 죽게 만든 것이었다.

인간의 몸은 생각이 지배하는 대로 움직인다. 특히 염려는 인간의 생명소를 갉아먹는 좀과 같은 것이다. 학자들이 쥐장 앞에 고양이를 한 마리 갔다 놓고 그 주위를 어슬렁 거리하고서는 쥐를 관찰했다. 고양이는 이리저리 주위를 맴돌기는 하지만 절대 쥐장 안으로 들어가 쥐를 잡을 수는 없게 했다. 그런데 그 쥐는 얼마 가지 않아서 죽었다. 고양이에 물려 죽은 것이 아니라 고양이에 대한 염려 때문에 암이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쥐만 그러는 게 아니라 인간도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쉽게 암에 걸려 죽을 수 있다.

염려란, 생각할 염, 생각할 려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는 것이다.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은 연구라고 하지만 부정적인 느낌에 쌓인 채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염려라고 한다. 없어도 아무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있어도 계속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염려는 습관이다. 사람들이 가장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이 무엇일까? 돈이다. 물질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래서 오늘 본문 25절 에서처럼 물질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본론:

1.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 염려하지 말라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 하시기 위해 세 가지 예를 든다.

1)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 세 가지 비유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1) 새, 백합화, 들풀은 먹고사는 문제를 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그 많은 날들을 염려하고 걱정 한다는 것이다.

2) 우리 인간은 피조물 보다 귀하다는 것이다.

4. 소유냐 존재냐?

1) 정신분석학자며 사회학 사상가인 독일인 에리히 프롬은 ‘소유나 존재냐’의 책에서 인간의 생활 방식은 소유 양식과 존재양식으로 지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2) 소유 양식의 삶에 지배 받는 사람은 수동적이고 발전 가능성이 없는 반면 존재 양식에 지배 받는 삶은 어떤 것에 집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해 가는 유동적 삶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나누고, 관심을 함께 하고 살아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3) 하나님은 바로 존재양식이 지배하는 인생이 되길 원하신다

구약성경: 이집트의 노예로 살던 유대인은 소유 양식을 가지고 살았으나 모세를 통해 광야로 나가면서 존재양식과 소유 양식이 양립하게 되었다. (민 11: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예수님 =>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빵을 소유하는 양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존재)과 함께 하는 존재 양식의 중요성을 말씀하심)

4) 비유에서 말하는 것 => 소유 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자세가 존재양식으로 바뀌어야 인간은 돈(물질) 걱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다.

5)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염려의 근본 원인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다.(잘 먹고 잘 사는 것, 좋은 옷 입고 좋은 집에서 좋은 차 타는 소유욕에 있다)

5: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먹는 것, 입는 것(소유욕)이 인생 전체의 관심사이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이 모든 걸 아신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소유 양식의 생활 방식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니 이젠 존재 양식에 더 힘을 쓰라는 말이다.

1) 우리의 존재 목적은 먹고 마시는데 힘을 쏟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예배하기 위해서 존재 한다는 것이다.

2) 소유 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의 변화된 예

박진영 가수 겸 연예 엔터테인먼트 사장(프로듀서)

그는 전 원더걸스 소속 사장이었다.

그런데 TV프로그램에서 본 그는 예전과 전혀 달랐다. "이스라엘에서 생활하는 3년 동안 성, 결혼, 연애, 일과 같은 내가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다 바뀌었다"면서 "내가 했던 모든 주장과 논리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다"라고 밝혔다. (인생 본질에 대한 진지한 노력들이 감동적이었다. 창조에 대해 1년 공부, 진화와 지적설계에 대해 또 2년 공부. 기독교에 대해 아직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한 상태)

박진영의 놀 만큼 놀아봤어!라는 곡을 보면,

1. 나 놀 만큼 놀아봤어 왠지 몰랐어 뭐 때문에 열심히 살지 돈을 벌어서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둘러보았어 무엇으로 나를 채울지 먹고 먹어도 왜 계속 배가 고프지

예쁜 여자 섹시한 여자 함께 즐길 만큼 즐겨봤어 (결국엔 또 허전했어 언제나 그때뿐이었어)

아침에 술 깨 겨우 일어날 때 그 기분이 싫어졌어

이젠 사랑을 하고 싶어 baby 혼자 집에 오는 길이 싫어 lately 이런 날 어서 구원해 줘 baby 제발

2. 꺼지지 않을 음식으로 나를 배 불려줘 눈 감을 때 두렵지 않기를 눈 감을 때 웃을 수 있기를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면서 내딛는 힘찬 발걸음으로 살기를 이젠 사랑을 하고 싶어 baby 혼자 집에오는 길이 싫어 lately 이런 날 어서 구원해 줘 baby 제발 꺼지지 않을 음식으로 나를 배 불려줘

please save me save me :소유 양식에서 벗어나서 존재의 이유를 묻는 존재 양식으로의 변화에 몸부림 치는 내용이다.

Save me가 참 인상적이었다. 언젠가 예수님을 영접할 줄로 생각이 든다.

6. 염려는 죄다. (소유욕에 갇힌 사람은 결국에는 염려하게 되는데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27절처럼 말씀하신다)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1) 어차피 되지 않을 일 염려 말라. R. Mounce ‘염려는 실제적으로 무신론이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죄라는 것이다. 왜냐면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부정하기 때문이다.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2) 염려가 죄라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으므로 염려가 결국에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3) Men's Health 잡지 인용: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심장마비로 죽을 확률이 높다는 하버드대 연구결과 나옴. 1759명을 지난 20년간 추적한 결과, 유난히 걱정을 많이 한 사람이 걱정을 덜 한 사람에 비해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이 두 배 가량 많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염려, 걱정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건강에 대한 염려가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삶에 비해 39% 정도 협심증에 걸릴 확률이 많고 재정 문제로 걱정 많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약 20% 정도 심장병에 걸릴 위험이 더 많다고 한다. See: Proverbs 12:25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7. 해결책:

이젠 염려가 죄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 해결 책은 바로 33절에 있다.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1) 한 마디로 존재양식이 지배하는 삶을 요구하신다. 성도가 이 땅에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다.

2)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 생활 가운데서 주인과 왕으로 만드는 것이다.(섬기는 것이다) 예수님이 모든 걸(인간관계, 돈, 계획…) 통치하시고 제어하신다.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살고 있으며 먹을 것, 입을 것등은 이미 채워진 것이다.

3) 한나 이야기

 

한나 이야기

한나와 브닌나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브닌나는자신에게 자식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더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즉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나의 힘이라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힘이 되는 아들을 주셨다는 사고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힘이 되는 아들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주셨다 와 안 주셨다’는 의식에서 발생되는 차별인 것이다. 이런 차별의식에서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한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2:5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라는 말을 한다.

하나님은 한나를 잉태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다시 한나에게 아들을 주셨다. 이것을 통해서 없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있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한나는 세상의 중심을 하나님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리는 것도 주리지 않는 것도,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가난한 것도 부한 것도, 천국 가는 것도 지옥 가는 것도, 낮아지는 것도 높아지는 것도,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노력과 행위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는 것임을 노래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은 열심히 했는데도 왜 이런 일을 당하느냐는 것이다.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악하게 산 것도 아니고, 사기 치고 도둑질을 하면서 잘 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왜 홍수가 나서 불이 나서 사기를 당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드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늘을 원망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착하게 살았으니까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당함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자신을 중심으로 되기를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말한 한나의 찬양대로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된다. 하나님이 세상의 중심에 굳건히 존재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누리며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된 것이 아니다. 부한 자로 산다면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가난한 자로 살아도 그 중심에는 역시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가난함은 단순히 못 먹고 못 입고 사는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부요함도 세상의 좋은 것을 마음껏 누리는 풍요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과 환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인 것이다.

결론:

1) 염려는 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소유와 존재에서 아직도 방황하는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회개하고 선택해야 한다.

3) 존재 양식에 지배 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