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12: 비판하지 말라 - 마태복음 7장 1-5절

차작가 2023. 11. 3. 12:42

1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절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절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절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도입: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거나 비판하는 행동, 그것은 정작 그 사람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은 비판을 하고 싶은 우리 자신의 욕구를 만족 시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판의 말은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판의 결과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할 뿐더러 사람들 사이에 놓인 분노와 불신의 벽을 더욱 높아지게 만든다.

비판받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가 방어적으로 되거나 위축되는 것이다. 자신이 공격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이나 수치심으로 물러서고 말거나, 분노에 휩싸여 격렬하게 반격하게 된다.

누군가를 비판했을 때 그들로부터 ‘제 단점을 지적해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은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는가?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지적에 따라 자신의 잘못을 고치는 것을 싫어한다. 비판은 욕만큼이나 좋지 않는 습관이다.

비판이나 비난하는 습관에 대한 해결책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시하고 있다.

본문:

1.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1) 자신이 옳다는 주장을 전혀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신이 진정으로 옳기를 바라거나 옳아야 할 때가 있다. 누군가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다고 했을 때 그런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비판할 수 있다.

2) 건전한 비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분별력은 있어야 한다. 다음과 같은 것들은 건전하게 비판해야 한다.

* 하나님 말씀을 잘못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 선생들을 분별해야 한다. (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요일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교회 내 심각한 죄의 문제에 대해서 판단하고 적절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고전 5:11-12교회 안에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교회 직분자들의 자격에 대해서 (딤 전 3:1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3: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3) 판단 할 때 이런 것들 조심해야 한다.

*동기: 하나님만 아신다. 믿음의 정도에 대해서 와 외모로도 판단 하지 말아야 한다. 판단은 객관적인 것 보다는 주관적인 면이 많다. =예를 들어, 어느 지방신문 오피니언란에 무명의 이름으로 ‘교회에 출석한 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불평하는 글을 올렸다. “나는 30년 동안 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니 약 3천 번의 설교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 중 하나의 설교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내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되며 설교자도 괜히 시간만 낭비하고 사람들만 괴롭히고 있다” 이 편지가 독자들 간에 큰 논쟁이 벌여져 연일 오피니어란에 찬반의 의견이 투고 되었다. 다음의 글이 게재된 뒤에는 더 이상의 투고가 없이 논쟁이 끝났다. “나는 결혼한 지 30년이 되었다. 그 기간 동안에 내 아내는 거의 3만 2천 번의 음식을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메뉴를 다 잊어버리고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모든 음식들은 나에게 영양을 주었고 내가 일할 때 필요한 힘이 되었다. 만일 나의 처가 그런 음식을 주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죽고 없었을 것이다.

4) 비판은 쉽게 형성되는 습관이며 잘 고쳐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타락해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찾아 오셔서 가장으로서 가족을 죄의 상태에 빠지게 한 책임을 물으셨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 죄를 회개하기는 커녕 자신의 죄에 대해 하와를 탓하고(비난하고, 창 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와를 만드신 하나님을 탓함으로써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논쟁을 벌였다. 사실상 하나님을 비판한 것이다. 이런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유전되고 전가되어서 우리 인간은 이미 타락한 상태에서 잉태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 날 때 부터 이런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학습을 통해서 남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비판하는 습성을 가지고 태어 난 것이다.

이렇게 비판하는 습관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사도 바울은 롬 14:10-13에 이렇게 말한다.

5) 롬 14:10-13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비판하려는 습성(죄)과 싸우라는 것이다.

또한 야고보는 야고보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6) 약 4:11-12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오직 하나님만 판단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자리를 차지 할 수 없다.

7)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 판단 하려는 마음에 대해서 주님이 재림 하실 때 까지(세상 끝날 때 까지)싸우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2절에서 처럼 된다는 것이다.

2. 7: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하나님에 의해)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1) 이 구절을 메세지 성경은 ‘비판하는 마음은 부메랑이 되어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라고 해석된다.

2) 욥의 친구들: 욥을 함부로 판단하다가 하나님께 비판 받았다.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3) 하나님 만이 공의로운 심판을 하실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 심판할 것은 자제하되 하나님께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신 1:17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하였고

3. 왜 우리는 남을 쉽게 비판하는가에 대한 이유는 바로 우리 맘속에 자리 잡고 있는 위선적인 요소 때문이라는 것이다. (외식하려는 마음)

3-4절을 보자.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7: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1) 다른 사람 눈에 있는 자그마한 티끌(mote, speck: 과일의 썩은 흠)은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나무 기둥(beam, plank)은 보지 못하느냐? 내 눈 속에 아주 큰 나무 기둥이 있으면서 다른 사람 눈에 있는 작은 티클을 빼내려고 하는게 말이 되느냐.예수님이 과장법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한국 속담에 이와 비슷한 속담이 있다.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란다)

2) 남의 결점을 살피기 전에 자신의 결점이 얼마나 큰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죄는 쉽게 발견하면서 누구나 볼 수 있는 자신의 죄는 간과하려고 하는 인간의 타락한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윗의 경우(삼하 12:1-12)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죽이고 자식을 낳은 일에 대해서 거의 1년 가까이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신다.

12: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12:2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12:3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12:4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12:5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12:6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12: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12:8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12:9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3) 다른 사람이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를 뺏은 것에 대해서 그렇게 흥분하며 화 내면서 죽이라고 하면서 다윗 자신이 저지른 살인 죄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회개도 하지 않고 별로 큰 죄로 생각하지 않는 다윗의 위선적인 모습을 하나님은 지적하고 계신다. 우리도 다윗과 똑 같은 위선적인 사람임을 부정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위선적인 모습이 결국 남을 비판하도록 한다.

4)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항상 합리화하려는 마음이 있다. 죄를 범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간통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하면 간통이다 불륜이다 하면서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합리화 하려 하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애써 축소 시키려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위선적인 모습으로만 사는 한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삶의 악순환에서 절대로 벗어 날 수 없는 것이다.

4. 그래서 이런 위선적인 모습 때문에 남을 항상 비판하고 살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하나의 중요한 해결책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어떻게 말씀하실까?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1) 해결책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는 것이다. 들보가 무엇일까? 인간의 타락과 부패한 죄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뺄 수 있나? 바로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부패와 죄악을 직시하고 회개함으로 뺄 수 있다.

2) 예수님으로 인해 죄의 문제가 제대로 바르게 해결 될 때 비로소 자기 눈의 들보를 간과하고 남의 눈의 티를 빼려는 위선자의 삶을 멈출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남을 비판하려는 자세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고전 11:31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죄가 완전히 해결된 것을 본문에서는 들보를 뺀 상태라고 하는데 이런 상태를 갈 6:1에서는 온유한 상태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한다.

갈 6: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4) 다른 사람의 잘못은 지적해서 되는게 아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온유한 심령은 어떻게 갖게 되는가? 항상 예수님과 동행 함으로 가능하다.

결론:

비판은 또 다른 비판을 낳고, 결국에는 비판의 고리를 형성하여 모든 인간관계를 깨뜨린다. 그것은 마치 던지면 다시 되돌아오는 부메랑과도 같다. 어느 누구에 의해서 그 비판의 고리가 끊어져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 주길 원하신다.

비판이란 그냥 이해해 줄 수 있는 것들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마치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와도 같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단점과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포용하고 이해해야 한다. 남을 비판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의 단점을 바라보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결하는 것이 더 우선적인 일이다. 비판은 비판을 받는 대상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각 또한 부정적으로 변하게 하는 백해무익한 비생산적인 것이다. 이런 비생산적인 남을 비판하는 삶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벗어나 온유한 심정으로 남을 섬기시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