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15: 참된 제자가 되려면 - 누가복음 9장 57-62절

차작가 2023. 11. 5. 10:58

57절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5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절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쫓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절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절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본문:

I. 57-58절: 비용을 계산하라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1) 어떤 사람(마태복음(8:19)엔 서기관으로 나온다.)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다. 아무 조건 없이 어디든지 가겠다고 한다. 왜? 예수님 자체가 좋고 또 제자들도 괜찮아 보이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지혜에 감동이 되어서였을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경외심도 생겼을 것이다.(예수님을 반대하던 그룹인 서기관 그룹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2) 예수님의 대답은 한마디로 너 고생할 거다는 것이었다. 왜냐면 예수님은 좋은 것이나 편안한 것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머리 두 실 데가 없으신 삶을 사셨다.(동물도 다 제 집이 있는데)

3) 단지 따르겠다는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가진 것과 위치 등을 다 포기하고 자신을 철저히 부정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는 물질적 안락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현재 가지고 있거나 미래에 기대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마태는 돈 잘 버는 세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부 직업을 포기 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명예로운 직위를 포기했다. 포기하고 고난의 삶을 살았다. 고후 11장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함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예수님의 제자들의 최후를 보면 그들은 세상적으로 결코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세상적으로 보면 실패자의 삶이었다.

4) 어디든지 가겠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길은 위험하고 불확실한 여행으로 설명하신다. 이 때 이 말은 한 사람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이런 두려움이 어디든지 예수님을 따라 가지 못하는 이유다.

다른 이유는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라서 어디든지 가기 위해서는 포기 할게 많기 때문이다.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예수님처럼 자기 포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II. 59-60절: 즉시 따르라(행하라) – 우선 순위는 하늘나라 전파이다.

59절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1) 첫 번째 사람은 자발적으로 예수를 따르겠다고 오고 이번 사람은 예수님이 부르셨다. 12제자와 마찬가지로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13번째 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2) 이런 예수님의 부르심에 이 사람은 주저한다. 근데 그 사람이 주저한 것은 당연하다. 왜냐면 아버지의 장례 때문이다. 가정을 돌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충분한 이유가 된다.

3) 그런데 이런 이유를 대는 사람에게 대한 예수님의 요구는 상식 밖이다. 다른 사람에게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다른 일 곧 복음 전파하라는 것이다.

4)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장례풍습을 잘 이해하면 본문의 말씀을 잘 이해 할 수 있다. 먼저, 가족 중에 죽은 사람이 있으면 보통 애곡하는 기간을 일주일 정도 갖는데 이 때는 랍비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보통 풍습이다. 본문에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봐서 그 애곡하는 기간은 이미 지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이스라엘 장례 풍습이 우리와 다른 것은 우리는 바로 묘에 시체를 묻지만 이스라엘 당시는 사람이 일단 죽으면 빠른 시일 내에 가족 소유의 동굴에 넣는다. 그리고 나서 1년 정도 지나면 뼈만 남는데 그 때 그 뼈를 추려서 장례를 치른다.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이 처해 있는 시점은 아버지가 이미 죽었고 이미 그 시체는 동굴 속에 있으며 그 애곡하는 기간은 이미 끝난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는 것은 뼈를 추려 묻기 까지 적어도 몇 개월 길게는 약 1년 정도 기다리겠다는 의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적어도 상당 기간을 기다려 보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다. (아버지 장사 지낼 때 까지 기다려 주라고 한 것은 무한정 연기로 생각할 수 있다.) 이유야 어떻든 꽤 이치에 맞는 변명이다. 따라가기 싫다는 게 아니라 시점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절대 안됩니다’가 아니라 ‘지금은 안됩니다’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진심으로 따를 것이니 지금 당장은 따르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미지근한 신앙을 정당화 한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내일로 미룬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그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지금 우선 순위를 복음 전파에 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5)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즉시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이 순간에도 복음을 몰라서 죽어가는 영혼들이 많기 때문에 복음전파가 우선이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죽은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에게 맡겨 놓고 영적인 사람은 영혼 구원에 우선 순위를 두라는 것이다.

6)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 되는 것이 바로 우선순위를 잘못 두는 것이다.

7) 예수님은 가족의 일을 등한시 해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8) 참된 제자가 되는 두 번째 조건은 삶의 우선 순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다. 세상적인 일을 우선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복음 전파에 최우선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먼저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깊이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복음을 들고 나가야 한다. 우리가 있는 곳으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일하는 일터에서 복음을 전하고 외쳐야 한다. 이것이 소명을 받은 사람으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인 것이다.

III. 61-62절: 뒤 돌아 보지 말라

61절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1) 이 사람 역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먼저 해결해 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2) 그런데 당시 가족을 떠나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이별 파티를 치러야 했다. 그러다 보면 몇 주는 훌쩍 지나간다. 이 남자의 요구는 그의 진심을 보여 준다. 예수님을 따를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단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의 최우선 사항은 아닐 뿐이다.

3) 예수님은 이 말을 두고 쟁기 잡고 뒤를 돌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쟁기 잡고 뒤를 돌아 보면 어떻게 되나? 분명히 고랑이 비툴비툴해 질 것이다. 왜 뒤를 돌아보나? 미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 미련 때문에 하고자 하는 일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뒤를 돌아 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4) 왕상 19:19-21절 예수님이 원하시는 헌신의 수준을 잘 보여 주는 예로 엘리사 경우를 보면 (19: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쌍)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19:20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 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9:21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이 모든 행동은 절대 뒤를 돌아 보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돌아 볼 여지를 남겨 두지 않았다.

5) 하나님만 바라 보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다. 절반의 헌신이 아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절대적인 사랑과 온전한 헌신뿐이다.

6) 왜 예수님은 우리의 전부를 원하실까? 우리가 가장 포기하지 못하는 그 한 가지가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 가지만 빼고 나머지를 전부 예수님께 드린다고 해도 그 한 가지가 우상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뒤에 있는 뭔가를 돌아보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우상이다. 본문에 나온 이 사람에게 가족은 우상이었다. 가정적인 남자로 인정 받았을런지는 몰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기회는 놓치게 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 되는 것이 바로 전적인 헌신을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예수님에 대해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결론:

오늘 본문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 봤을 것이다. 혹시 그렇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면 이 순간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인생을 새롭게 해 주실 거라고 믿는다. 제 스마트폰에는 내비게이션 기능이 있다. 주로 언제 사용 하나면 내 힘으로 찾으려다가 못 찾고 헤맬 때 사용한다. 목적지를 입력하면 항상 현재 위치에서 시작하도록 자동으로 설정되어 있다. 출발한 장소에서 부터가 아니라 현재 위치에서 경로를 계산한다. 예수님도 우리를 과거에 어떻게 출발했는지는 생각하지 않으시고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의 위치에서 목적지까지 인도하실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따라 오시길 원하고 계심을 믿고 오늘 부터라도 다시 예수님과 새로운 출발을 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