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말씀 묵상

고린도 후서 1장~6장 묵상

차작가 2023. 10. 11. 11:24

고린도 후서는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도중 마케도니아에서 썼다.

내용으로 보아 고린도 전서가 쓰인 것과 시간차가 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서신교환을 통해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해결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편지에서 그들을 방문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음을 밝힌다.

그러나 방문이 성사되지 않았고 디도를 통해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

디도가 그들에게 전달한 이 서신은 신약 성경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이 편지로 너희에게 근심하게 한 것"이라는 7장 8절 때문에 근심의 편지 또는 비통한 편지라고 불린다.

디도로부터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하는 소식을 전해 받은 바울은 기쁨을 전함과 동시에

자신이 교회에 대해 안도함을 알리기 위해서 고린도 후서를 쓰게 된다.

또한 예루살렘의 유대 기독교인들을 돕기 위해 모금 참여를 독려하며 자신을 대적하는 소수의 무리를 향해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돼 있다.

사도바울은 서신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에야기하며 고린도교회의 문제와 오해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교회에서 다툼을 일으키는 그들에게 혹평하는 방법으로 개인적인 고통을 진솔하게 나누며

복음으로 연결해 승화하며 서신서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자신이 방문하기보다 서신을 보내기로 결정했음을 말한 후

자신의 상황에 대한 마음을 나누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자신은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약속된 새 언약을 논하는 것이 고린도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새 언약의 핵심은 돌판에 새겨진 외적인 율법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이며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이시다.

그 결과 사도 바울을 포함한 하나님의 일꾼들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옛 언약은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며 새 언약의 영광을 논하면서 복음에 대한 가르침을 더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차이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가장 커다란 차이일 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잠깐 보이는 것에 마음이 쏠려 있었다.

10장 12장에 언급된 큰 사도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있었다.

그들의 가르침은 사도 바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도 왜곡했다.

그러기에 새 언약에서 새로운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위를 통해 서신의 마지막까지 강하게 경고하며 서신서를 마친다.

그들을 향해 강하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을 넘어 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우기 위함이며 그것이 바울에게 주신 사도의 권위임을 분명히 한다.

(성경 에센스 고린도후서 편 참조)

사도 바울의 두 번째 편지가 고린도 후서이다.

고린도 후서의 중요한 단어는 바로 "위로"이다

오늘 1장에서 6장까지 묵상하며 사도 바울의 억울한 호소가 느껴져서 많이 공감했다.

당장 찾아가서 할 말도 있었겠지만 시간과 거리를 두고 마음을 추스르고 상처 주지 않으려는 목회자의 마음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나누고 싶은 장은 위로가 주제인 1장이다.

2절에서 7절까지 "위로"라는 말이 무려 11번 반복해 쓰여있다.

자신의 마음과 또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마음을 담았음을 위로라는 단어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1장 1절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라고 첫 문장이 시작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사도 바울의 사도권 문제로 시비가 많은 걸 알고 자신이 사도임을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서신서에는 사도라는 소개가 없지만 고린도전 후서에는 사도라고 명확히 소개하고 있다.

이 차이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유대 지역 성도들과 사도 바울을 사도로 받아들인 유대 밖의 성도들의 차이이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9장 3절에서와 같이 다메섹으로 향하다가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출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게 될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함께 생활하고 가르침을 받고 부활까지 목격한 사도가 아니므로 자신을

고린도전서 15장 8절과 같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가진 오해는 첫 번째는 "왜 바울은 고난이 많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 얻는 참 진리를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진짜 고난 가운데 있는 이웃을 위로하는 참 위로자가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참 위로자인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고난이 없다면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두 번째는 다른 사도들과의 비교이다.

사도 바울이 사례를 받지 않고 사역한 것에 대해 의심을 했다. 그리스도 교회의 본부인 예루살렘 교회에 기근과 핍박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을 알고 헌금을 부탁한 바울을 의심하며 끝까지 바울에게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다.

세 번째는 바울이 방문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1장 23절에 보면"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감정적으로 격해져 있었던 교인과 마주 대하는 것이 두렵고 서운한 마음이 컸던 바울은 시간을 두고 서로 생각하기 원해서 의도적으로 가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고린도에 다시 가지 않았던 것이다.

네 번째는 추천서 문제였다.

그 당시 문화는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은 사도 됨을 증명하는 추천서를 가지고 다녔다.

그러나 추천서 없이 선교하러 다녔던 바울의 사도의 권위를 의심했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추방되어 고린도로 홀로 가게 된 바울이 로마에서 추방되어 고린도로 오게 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만나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였다.

낮에는 말씀을 강론하고 밤에는 천막을 지으며 사역한 교회였으며 바울이 사역한 교회 중에 가장 오랫동안 머문 교회였다.

제자 양육을 통해 교회가 잘 성장하자 바울은 에베소로 다시 선교지로 옮긴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사도권 문제와 추천서 문제를 걸고넘어지니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면

방문하기로 했다가 안 가는 걸 반복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바울은 시간을 두고 서신서를 보내며 그들의 오해가 풀리고 상처도 치유되길 기다렸다.

그리고 위로의 말을 서신서 첫머리에 무려 11번을 적으며 진정한 목자의 마음을 보여줬다.

나는 이 부분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나 더 이상 나를 정죄하지는 않는다.

이젠 고난을 통해 위로자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위로의 바나바와 2차 선교 여행 시 마가를 향해 중도 하차한 사람과 함께 갈수 없다며

심하게 다투고 바나바와 헤어지기까지 한 성격이다.

모두 바울을 부인할 때 바나바의 도움으로 12제자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도로서 사역을 할 수 있었는데 바나바와 다툼으로 헤어진 사람이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다듬으시고 위로자로 세워주셨다.

그 하나님이 많은 고난을 통해 나도 위로를 받고 남도 위로해 줄 수 있는 위로자로 사용하심을 믿고 감사드린다.

(cbs성서학당 고린도 후서 강해설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