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말씀 묵상

고린도 후서 6장에서 13장 묵상

차작가 2023. 10. 11. 11:26

고린도교회의 설립 배경을 알면 고린도서 전체를 이해하기 쉽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베뢰아에서 전도하자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와서 소동을 일으키자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와 나누어져 인도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아덴으로 인도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디모데와 실라를 아덴으로 오라고 전하며

아덴에 혼자 남겨진다. 아덴은 그리스 아테네를이다.

그곳에서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을 모시는 신전이 가득한 걸 보고 참지 못하고 혼자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그곳에서도 쫓겨나 고린도로 옮겨가게 된다.

로마는 식민지에 종교에 관대한 정책을 폈으나 사회를 어지럽히는 일에 대해서 강력한 정책을 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로마제국에 의해 재개발된 항구 도시였다. 상업이 발달한 부유한 도시였고 사치가 심하고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다.

바울이 아덴에서 추방당하고 고린도에 도착했을 무렵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가 즉위했을 때

로마 교회에선 신학적인 문제로 싸움이 일어나 그 문제가 황제에게 알려져서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 기독교인들을 추방하는 사건이 생겼다.

그때 많은 기독교인들이 고린도로 이주하게 되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생업으로 천막을 짖는 일을 했다.

갑자기 인구가 늘어난 고린도에는 천막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일손이 필요했고

바울도 천막을 짖는 일을 했으므로 그곳에 취업을 하게 된 것이다.

바울는 랍비였지만 랍비는 전통적으로 사례를 받지 않는 직업이었으므로 생계를 위해 랍비들은 저마다 하나의 기술을 가졌는데

때마침 바울은 천막 짖는 일을 하며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유대인 기독교인 임을 알고 함께 밤낮으로 일하며 바울은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대략 3년이 못되어 고린도 교회에도 사역자가 세워지자 바울은 다른 사역지인 예배소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글라우디스 황제가 죽고 추방령이 무효화되자 고린도를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고린도에서 분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디도 편으로 서신을 보내게 된 게 고린도전서이다.

이때 성도들이 회개함을 듣고 위로를 받았지만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부분이 있으므로 다시 보내게 된다.

바울이 예배소에서 마케도니아로 선교지를 옮겼을 때 2차 서신을 보내는 것이 고린도 후서이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과 서신을 교환하며 오해를 풀긴 했지만 여전히 상처가 남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여러 파벌의 생성으로 인한 갈등이었다.

서로의 잘못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바울의 사도권 문제 등 다툼으로 인한 위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디도 편으로 다시 고린도후서로 남긴 서신을 보내게 된다.

6장 이후로 바울이 기가 찰 정도의 상처를 입은 것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는데

바울이 교회의 상처를 먼저 감싸 안는 모습이 목자가 어떠해야 됨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편지인 내용에서 오늘은 7장을 나누고 싶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회개를 기뻐하며

1절에서 "그런즉"라고 시작하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라고 말한다.

깨끗함은 거룩함을 뜻한다. 즉 영과 육의 거룩함을 이루자라는 뜻이다.

바울은 그들을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처 입은 교인들에게 자신의 상처에서 눈을 돌려 거룩한 하나님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 서신을 쓰는 목적은 12절에 보면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함이라"라고 고백한다. 즉 고린도 교회의 간절함 때문이었다.

바울은 용서라는 훈련에 통과한 교인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보길 원했다.

문제를 서로 용납하고 이젠 시선을 하나님께 돌려 함께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회복이고 위로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온전히 회복되길 바라는 위로를 보내는 것이다.

서로 용서한다는 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볼 때 온전한 회복을 통해 위로가 임하는 것이다.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14절"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같이

디도 앞에서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라는 바울의 말에 울컥했다. 목자의 마음이 가슴을 쳤기 때문이다.

많은 애정을 가졌기에 교인들의 무례함도 참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하나님을 바라볼 땐 온전한 위로를 경험했기에 할 수 있었던 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