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는 어느 특정한 도시나 장소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1차 선교여행에서 소아시아 지역에 속한 어느 지역을 지칭한다.
이런 면에서 특정 교회에 쓰인 다른 서신과 차이가 있다.
서신 내용이나 사도행전과의 연계성을 통해서 볼 때 갈라디아서는 사도바울의 서신들 중 가장 먼저 쓰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 지역의 교회들은 유대주의자로 불리는 거짓 교사들로 인해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다.
갈라디아서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 유대주의자라고 불리는 무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유대주의자들은 일반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초기 기독교 내에 있었던 특정한 유대인 무리였다.
그들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인이 되려면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거나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께 회심했다는 증거라며 기독교를 그리스도 +모세 주의라는 종교적 체계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사도 바울은 이같이 믿음 더하기 철저한 율법 준수라는 주장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완성된 구원의 충분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았다.
동시에 윤리적 삶의 원동력이 되는 성령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유대주의자들은 신앙 더하기 율법주의 사상을 새 메시아이자 다른 복음으로 불렀기 때문에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복음은 절대로 없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그리스도 더하기 모세 형식인 율법 체계에서 나온 운동이라 여기고 그리스도 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할 것이 아니라 단지 그룹에 속할 것을 주장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을 떠나 너무나 쉽게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간 교회들을 바로잡기 위해 이 서신을 썼다.
그러다 보니 갈라디아서를 쓸 때 사도바울의 감정이 얼마나 격했는지 서신의 시작부터 느낄 수 있다.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과는 달리 칭찬 문구가 전혀 없다.
사도바울의 격한 감정은 5장 12절에서 할례를 요구하는 이들이 할례 정도가 아니라 칼이 더 깊이 들어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한다는
과격한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서신의 끝부분에 이후로는 누구든지 이런 일들로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할 정도이다.
이러한 감정의 진솔함과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갈라디아서의 가장 큰 특징이다.
유대주의자들의 주장 중 특히 할례와 음식에 대한 법을 다룬다.
음식에 대한 것은 무엇을 먹느냐와 누구와 먹느냐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러한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편견이라고 밖에 말할 수밖에 없다.
사도바울이 율법에 대한 무효임을 논한다고 해서 율법의 조문이나 도덕적 규칙의 선한 기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함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것을 더하여 기독교를 변질시키기 때문에 율법주의를 배척한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문제는 초대교회가 초창기에 겪어야 했던 문제였다.
교회에 이방인이 많아지면서 이방인들과 율법과의 관계는 피할 수 없었다.
갈라디아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과감하고도 확실한 답을 제시해 준다.
(성경 에센스 갈라디아서 김윤희 교수 참조 )
오늘 나누고 싶은 말씀은 2장 말씀이다.
사도행전 15장 36절에서 40절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마가의 문제로 심하게 다투는 사건이 나 온다.
1차 선교 여행 시 중도 포기한 마가를 2차 선교여행에 다시 기회를 주어 합류해 줄 것을 부탁하는 바나바의 의견을 거절하므로 다투었던 것이다.
이 일로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바울은 실라와 함께 나뉘게 되었다.
그 이후 2절에 보면 십사 년이 지나서 바울은 디도를 데리고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서 만난다.
그리고 할례의 문제를 접하게 된다.
사도행전 16장 1절에서 디도는 바울의 제자이며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칭찬받는 자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들이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자 바울이 반대하며 그 이유를 4절과 같이 말한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럼 왜 디모데는 할례를 받게 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사도행전에서 다뤘다시피 디모데는 선교의 방향이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만날 때 할례로 인한 걸림이 없게 하기 위해서 할례를 전도의 전략적인 접근을 위해 받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디도의 경우는 갈라디아서 2장 3절에서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라고 디모데와 다르게 바울이 결정을 한다.
당시 거짓 교사들은 복음에 더하기 모세의 율법으로 이미 예수님이 완성하신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었다.
율법을 지키므로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이 완성된다"라고 주장했다.
이 상황에서 디도가 할례를 받는 것은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는 것이 되었으므로 받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바울이 이런 결정을 한 것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율법 중에 단 한 가지만 어겨도 율법은 지키지 않은 것이 된다.
율법에서는" 간음하지 말라"했지만 예수님은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것도 이미 간음한 거라고 하셨다.
결국 단 한 계명도 우리는 지킬 수 없는 것이 율법이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시고 완성하셨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우리 자유가 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공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바울이 진리를 알았기에 분별력과 통찰력으로 옳은 결정을 할 수 있었다. 복음에 무엇도 더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 안에 자유로운 자이기에 내릴 수 있는 결단이었다.
나에게 복음을 주셔서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리게 하셔서 감사드린다. 이 진리를... 담대하게 전하는 삶이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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