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고린도교회는 로마교회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로마의 글라디우스 황제 시절에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추방함으로 인해 그리스로 이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서 세워진 교회이다.
처음 시작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고린도 교회가 시작되었다.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도시였다.
항구도시로서 무역이 활발히 일어났고 물질적으로 아주 풍요로운 일종의 신도시였다.
또 다른 나라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왔기 때문에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 있는 도시였다.
그래서 물질주의적인 성향을 가졌고 사치도 아주 심한 도시였다.
다양한 민족들이 섞여 사는 항구 도시여서 신전들과 우상들이 많은 도시였다.
그리고 그 신전에서 신녀들이 창녀 같은 음란한 행위를 통해서 제사를 드리는 음란 행위가 팽배한 도시였다.
그 신전에는 수천 명이나 되는 신녀들이 돈을 받고 행음을 했기에 그 신전에 드려진 제물이 차고 넘쳐나서
그 신전을 거쳐가지 않은 고기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고린도의 시장에서 팔리는 대부분의 고기는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고기들이었다.
바울은 1년 6개월 정도 고린도에 머물면서 교회를 개척했고 이후에 에베소로 건너가게 되었다.
대략 고린도 전서는 A.D. 54년에서 55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바울에게 고린도교회는 바울과 서신을 통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그러한 관계였다.
그러던 중 고린도교회에 위기가 닥친 것을 알게 되었다.
바울이 고린도 전서 서신서를 기록한 목적을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고린도 교회의 위기에 대한 답변이고
1장 11절에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게 들리니에서 알 수 있듯이 수시로 편지를 통해 고린도교회 사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헌금에 대한 감사이다.
16장 17절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대표적인 문제가 교회의 분열이다. 세례 문제를 두고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누고
다투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교회에도 음행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고린도 지역은 행음과 타락함이 만연한 사회적 문제가 있었는데 그 문제가 교회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아내를 아내로 삼는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그 당시는 아버지가 죽으면 그 아내가 모든 재산을 상속받기 때문에 의붓아들이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여서 자신의 배를
불리려고 하는 일이 있었다.
그 문제가 교회에서 발생했고 교회는 그 문제를 물질적인 문제로 치리하지 못했다.
이처럼 타락한 고린도를 보며 사람들은 "고린도 사람처럼 행하다"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였다.
즉, 이 말은 "성적으로 부도덕하다"라는 표현이다.
그리고 교인들끼리 서로 분쟁하고 소송하는 일이 있었고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는 문제가 있었고
성찬 문제도 있었다.
이 성찬 문제는 그 당시 교회는 가정 교회였기 때문에 가정을 오픈한다는 것은 큰 집을 가진 재력가였다.
성찬식은 지금처럼 작은 빵조각 하나와 작은 포도주스를 나누는 정도가 아니라 당시에는 함께 음식을 나누는 성찬이었다.
가정을 오픈하는 주인과 음식을 준비하는 몇몇 성도들은 일찍 모여서 음식을 준비하는 여유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단순노동하는 사람이나 노예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일을 하고 늦게 와야 하는 상황이고 음식도 준비하지 못했다.
일찍 온 부자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상석에 앉아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문 앞의 하석에 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도를 하고 음식을 나눌 때에 앞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먼저 음식을 자기의 그릇에 담고 나면
끝에 앉아 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음식이 거의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뒤늦게 온 가난한 자들은 만찬에 참여하지 못하는 문제를 겪게 되었다.
그래서 그 예배는 형식적인 예배의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부활 신앙을 부인하는 문제들도 생겼고 성령의 은사에 관한 문제도 생겼다.
이 모든 문제들은 고린도 교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현시대에도 이런 문제들을 많이 접할 수 있다.
고린도 전서는 이런 문제들을 직면할 때 현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 방법을 알려 주는 서신서이다.
바울은 편지를 통해 그들이 질문한 편지에 하나님 말씀으로 조언을 해 준다.
고린도 전서는 실천 신학의 보화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실 속에서 당면하는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또 해결책도 주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린도 교회 이야기이지만 현대 교회가 직면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10장까지 목상을 했다. 그중에서 나누고 싶은 장은 9장이다.
9장은 사도의 권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1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에
"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라고 시작한다.
이 말씀으로 비추어 보아 자신이 사도임을 분명하게 말하는 걸 볼 수 있다.
고린도 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사도 바울에 대한 사도권 문제를 부인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시작부터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는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이 사도라고 일컬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만삭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나 사도는"라고 표현한 것처럼 언제나 사도권에 대한 시비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게 사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고린도교회의 성도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을이 1년 반 동안 온 힘을 다해 개척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개척한 교회에서 마땅히 사례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자신이 천막을 짖는 일을 하며 사도로서 섬겼다.
7 절에 보면"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라고 말하며 군복무하며 월급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될 것도 받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로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사도 바울을 대하였음을 짐작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8 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모세율법에도 보면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라고
기록한 것을 근거로 구약시대에도 제사장으로 일을 할 때에도 마땅히 그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될 백성들의 의무감을 말하며
자신은 율법적 근거도 있지만 받지 않았는데 사도권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권리를 쓰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장애가 되고 싶지 않아서 쓰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성전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그곳에서 나는 것으로 먹을 수도 있고 또한 재단과 함께 나누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므로 자랑할 것도 아니며 부득불 할 일임이라고 말한다.
15 절에 보면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 안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대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진심이 느껴지는 구절이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17 절과 18절 말씀처럼 자신은 사명을 받았고 이것을 전할 때 자의로 하면 상을 받고
자의로 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명이라고 고백한다.
복음을 전할 때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사례를 받던지 안 받던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한다는 것이다.
19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얻고자 하니라."라고 쓰여 있다.
이 말씀에 너무 나는 동감한다.
우리도 사역을 할 때 사례금 문제로 많이 힘들었었다.
생활하기 힘들 정도로 사례금이 너무나 작았지만 그 사례금도 제대로 제때 받지 못할 때가 많았었다.
그래서 남편은 생활하기 위해 의료 통역 자격증 땄고 다시 틈틈이 인공지능 공부를 해서 직장을 가지며 사역을 할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고 교회를 뜻하지 않게 나오게 된 것이다.
지금도 사역을 하고 있다. 담임 목회의 길은 아니지만 인공지능과 기독교 윤리나 창조과학 복음을 강의하고 있다.
모두 다 우리 같이 사역할 수는 없다. 당연히 목회를 하면 사역하는 교회에서 목회자의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기쁨으로 감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사역을 하며 물질로 인해 상처받고 또 그것이 방해가 되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이 있었다.
사도 바울 된 사례금 때문에 22절에 보면"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말한다.
우리도 같은 머음으로 자비량을 선택했다.
모든 사역자들이 사도 바울처럼 할 수는 없다.
모세가 말한 것처럼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것은 어느 직업에서나 마땅한 권리이다.
군사가 군 복무를 할 때 월급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굶으면서 나라를 지킬 수도 없고 월급을 받을지 않으면서 회사에서 일을 할 수는 없다.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연약한 자를 위해 사도 바울이 포기한 모습을 보며 복음의 확장을 위해 자기의 삶을 내던지는 그 모습이 은혜가 되었다.
사도 바을 과 같은 그런 대단한 결심은 없지만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고 또 하나님께서 남편과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모습도 사역이고 또 온전히 목회를 하는 것도 사역이다.
어떠한 방법이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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