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후서로 보아 바울이 보냈던 데살로니가 전서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 했던 것을 보여 준다.
한마디로 데살로니가 후서는 종말에 대한 오해로 인해 생기는 고질적 문제에 대한 첫 처방이 약효를 발휘하지 못하자
내린 두 번째 처방이라 할 수 있다.
데살로니가 후서는 전서를 쓴 후 적어도 1년 안에 답한 것으로 주후 50년 경에 쓰인 것으로 보이며
바울의 초기 서신에 속한다.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 전서 다음 후서 순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편지를 통해 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이 갈수록 심해져 희생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상황을 알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의 서신을 빙자한 거짓 서신들과 잘못된 사상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점차 증가하는 것으로 보아 종말의 시기가 이르렀다고 믿게 하고 있었다.
한편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오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처한 자신들의 삶을 회피하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하던 일까지 그만두고 재림만 기다리는 상황이 심해지고 있었다.
전서와 비교해 보면 그들을 향한 격려와 칭찬은 매우 짧다.
대신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주어지는 상급과 처벌에 대해 가르치면서
성도들이 핍박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한다.
그 이유는 도가 지나치는 수준의 때이른 종말론적 기대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먼저 보낸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가르친 말씀 때문에 그들은 종말적 기대로 가득 찼던 것 같다.
이러한 분위기에 취한 그들을 향해 바울은 "종말" 즉 "주의 날"이 도래하기 전에 나타나야 하는 증거가 있다는 것을 가르침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그는 주님의 재림이 그들이 생각한 것처럼 임박하지 않았음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일상과 생업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이 일상적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 것을 말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질서와 균형을 다시 잡고자 했다.
바울의 어조도 전서에 비해 매우 강경하다.
한 예로 데살로니가 전서 4장과 5장에서는 의무를 태만히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점잖게 꾸짖지만
후서 3장에서는 "그의 말에 순종하지 않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도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라고 권하면서
매우 강하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끝부분에 서신의 진실성을 강조하고자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라고 말하는데
이는 거짓 편지도 나돌았음을 알 수 있다.
초기 바울의 개척교회 교인들도 종말론 때문에 많은 혼동을 겪었다. 현대에도 종말론으로 교회들이 시끄러웠던 적이 많다.
데살로니가 후서에는 그에 대한 오해들을 풀어 줄 바울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지혜가 들어있다.
(성경 에센스 데살로니가 후서 편 김윤희 교수 참조)
데살로니가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다.
그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면 모든 사람들은 첫 번째 사망을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죽음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살아있는 신자들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첫 번째 부활이라고 하고
두 번째 부활은 이미 과거에 죽었던 사람들이 부활해서 믿음의 성도들은 심판을 경험하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변형된 몸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고 둘째 사망은 예수 믿지 않고 부활한 불신자들에게 내리는 영원한 심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가르침을 통해 재림에 대한 오해를 벗고 일상으로 돌아가 믿음의 본이 되는 삶을 통해 예수님을 나타내며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많은 핍박으로 인해 어려움이 컸기에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렸음을 역사가 증거함으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힘든 순간에는 빨리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건강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 예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켰던 그들의 삶에 존경을 표한다.
데살로나가후서 2장 14절에 보면
2:14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를 위하여"라는 무엇을 위하여 인지 앞절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성령의 거룩하심과 참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심을 뜻한다.
이를 위하여 성도들을 부르셔서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즉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은 나를 택하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참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심을 위한 것이며
나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발견한 말씀은 3장 2절 후반절에 나오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라는 말씀이다.
결국은 택하시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이다.
내가 받은 믿음, 나를 구원하신 사랑, 나에게 부어주신 성령 이 모든 것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나의 하루를 풍성하게 했다.
이 믿음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고 올바른 종말의 삶을 사는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