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는 마게도니야의 수도로서 로마와 현대의 이스탄불인 도시를 거쳐서 유럽의 동쪽을 연결하는 당시 군사용 상업용 도로망인
"비아에그나티아"에 위치한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신약시대에는 약 20만 명이 살고 있었으며 헬라인들이 많았으나 발달된 도시에는 늘 유대인 사업가들이 있었으며
특히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의 이름은 카산더 장군의 부인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누이인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또한 데살로니가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그곳에 살고 있던 약 6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인 곳이기도 하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이곳에 어떻게 바울이 교회를 세우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바울은 최소한 세 번의 안식일 동안 유대인 회당에서 강론하며 사역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나 그의 성공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인해 디모데만 그곳에 남겨 놓고 혼자 베뢰아로 급히 도망하게 된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을 보면 바울은 그 짧은 기간에도 손수 일을 하며 그들을 위해 사역을 했으며 사역 기간 중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빌립보 교회로부터 2번 재정적 지원을 받기로 한다.
사도바울이 베뢰아에서 있을 때에도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이 깡패를 보내어 바울을 핍박했다.
그리고 아덴으로 이동했을 때 거기서 디모데를 다시 만난다.
하지만 바울은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로 보냈다가 나중에 고린도에서 합류하게 된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을 토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다녀온 디모데의 보고에 근거해서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전서를 썼다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의 근원은 바울이 그곳에 머문 기간이 매우 짧았으며 그런 것치고는 양질의 교리적 가르침을 주었다는 데 있다.
그로 인해 그들 간에 생긴 오해와 함께 발생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데살로니가 전서는 갑작스럽게 두고 떠나온 어린 교회를 돕기 위해 쓰였다.
서신을 보면 그의 짧았던 방문에 대해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바울이 그들을 간절히 보길 원한다는 말이 숱하게 나온다.
그들을 두고 갑자기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다시 돌아가고자 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그들에 대한 궁금함이 디모데를 그곳으로 보낸 이유라는 것도 말한다.
특별히 3장 10절에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라는 표현을 통해서 양육에 대한 바울의 아쉬음과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심한 핍박 속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디모데의 보고에 따라서 그들을 칭찬하며
"더욱 많이 힘쓰라"라며 진보하기를 격려한다.
서신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그들의 이해였다.
바울이 그곳에 짧게 머무르면서 행한 가르침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것이 오해를 낳았고 그것이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재림전에 죽었던 자들은 그들의 죄에 대한 처벌을 받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재림전에 죽은 자들은 재림 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가졌으며
바울은 우리가 "휴거"라고 해석하고 있는 부분을 통해서 재림하시는 주님과 그들이 하나가 될 것을 분명히 한다.
또한 재림을 염두에 둔 "주의 날"을 논하며 깨어서 살 것을 도전한다.
깨어 산다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 영역 이상의 것을 말한다.
이는 개인과 공동체 삶의 영역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이방인들의 무분별한 성적 기준을 따르려는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지도층과 평신도 간의 계층적 긴장 등에 영역에 있어서의 개선까지도 포함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삶의 지친 구절로 그토록 유명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가 나온다.
이렇게 데살로니가 전서는 말세와 재림의 때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 주고 있다.
(성경 에센스 데살로니가 전서 편 김윤희 교수 참조)
지난 며칠 동안 예수님을 믿는 자의 삶에 대해서 묵상을 이어오고 있다.
아마도 성령님이 이 부분에 있어서 나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는가 보다.
오늘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한다.
1장 2절에서 8절을 통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삶을 묵상하며 그들처럼 본이 되는 삶을 살기를 소망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 안에서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내었음을 알고 있었다.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유대인들의 핍박 가운데에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인내했다.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은 본인 먼저 안다.
왜냐면 본인의 영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인도 본인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하다.
만약 타인이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본인의 믿음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택함 받았다는 증거는 본인도 알고 타인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3절에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너희의 믿음이"라고 시작했지만 자신도 "그들의 믿음을 기억한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4절에서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그들이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확신이다.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들은 그 믿음의 확신을 삶으로 보여 주었다.
그들은 환란 가운데에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주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다.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의 믿음은 주위에 여러 도시에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다.
주위 사람들도 그들이 진정으로 택함 받은 백성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그 소문은 각처에 모두 퍼졌으므로 바울이 이 믿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들의 믿음을 확신했다.
4: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4: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을 인정하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믿음에 대해 확신했다.
그래도 더욱더 올바른 믿음 생활을 할 수 있기를 "힘쓰라"라고 당부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인지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읽으며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울이 인정하는 믿음의 생활, 주위에도 인정받는 믿음의 생활, 삶 가운데 믿음을 실천하며 사는 그 모습이
주위 각처에 소문이 나서 더 이상 말할 것도 한 점도 보탤 것이 없는 그들이 나에게 너무도 도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의 삶은 타인도 인정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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