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말씀 묵상

베드로 후서 묵상

차작가 2023. 10. 12. 11:18

베드로후서의 주제는 종말이 다가옴에 따라 어려움에 처한 믿는 자들의 신실한 삶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서신을 쓸 때 서신의 수신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이단적 가르침으로 인해 긴박한 위험에 처해 있었으며

베드로가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3장 15-16절에 "....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에서 이미 다수의 바울 서신이 발행된 듯한 표현을 쓰고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베드로는 후서를 자신이 죽기 전 60년대의 어느 시점에

전서와 같은 장소인 로마에서 썼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서신을 둘째 편지라고 부르는 것을 볼 때 후서의 수신자는 전서의 수신자와 동일한 그리스도인 그룹이라고 봐야 한다.

베드로 후서에서는 베드로전서와 달리 환란과 핍박보다 이단에 의한 가르침의 위험성이 더 큰 이슈였다.

베드로는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향하여 믿음에 대한 근거를 다시 기억나게 하며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변함없이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서신을 썼다.

이들을 유혹하고 있는 이단들은 골로새서에서도 보았듯 초기 영지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육체는 어차피 더러운 것이기에 일종의 도덕 무용론을 주장했다.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없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삶을 인정하신다는 가르침이 돌아다녔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즉각적인 심판을 하시지 않는 이유는 오히려 하나님의 긍휼의 중거이며 강림이 늦추어진 것은

모든 이들이 회개할 시간을 주고자 함이라고 가르친다.

베드로는 첫 번째 서신과 유사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고대하며 기다리라고 조언한다.

인용하는 모든 구약의 구절들은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소망과 신뢰에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라고 말한다.

그분의 재림이 확실히 있기에 백성들은 그것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베드로 후서는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전서와 달리 변화산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경험에 특별한 관심을 부각시킨다.

존귀와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이 중요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유다서 4장에서 18절의 내용의 대부분이 베드로 후서에도 담겨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둘 중에 어느 서신이 먼저 쓰였다거나 배후에 공통된 출처의 자료가 있다는 등

학자들이 다양한 주장을 하지만 어느 것이 맞는다고 확실히 밀할 수는 없다.

오히려 단순히 수신자들이 처한 상황이 유사하기에 같은 내용이 담겼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성경 에센스 베드로후서 편 김윤희 교수 참조)

베드로 후서는 3장으로 되어 있는 짧은 서신서이다.

짧지만 죽음을 앞둔 베드로는 터키에 흩어져 있던 기독교 디아스포라에게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남긴 의미 있는 서신서이다.

기독교 디아스포라는 많은 핍박을 겪으며 진실로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했던 상황이었다.

어쩌면 그들 마음속에 너무나 힘들어 이 현실을 피할 길은 예수님의 재림밖에 없다는 마음이 있었을 것 같다.

그러기에 거짓 선지자들이 그런 틈을 노리고 그들에게 도덕 무용론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이 그들을 흔들었던 것이었다.

베드로 전서는 외부적인 환란을 대비해서 기록했다면 후서는 내부적인 혼란에 대비해서 기록한 서신서이다.

즉, 전 후서가 고난을 대비하기 위한 서신이지만 고난의 성격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이 육신은 무익함으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영지주의자들에 의해 혼란을 겪는다는 것을 듣고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지키라는 것을 1장에서 말하고 있다.

1장 4절에 보면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신의 성품"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말한다.

도덕적으로 혼란을 겪는 그들을 향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나무의 가지이다.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붙어있어야만 된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붙어 있다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하다.

1: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1: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 믿음은 우리의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믿음의 주체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분은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게 하신다.

믿음의 주체가 우리였다면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믿음의 주체가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경주에 참여하므로 끝까지 완주할 수 있다.

여기에 덕의 기초는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경영하실 때 말씀을 주셨다. 즉 그리스도가 주신 믿음은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며 이것이 덕이다.

덕의 지식은 성경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알아가는 것이다. 말씀 속 약속은 하나님의 전체 경영을 깨닫게 한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십자가의 덕을 알게 하고 이 덕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경영하시는 그 가운데에 역속의 말씀을 두셔서

하나님의 경영을 깨닫는 지식을 얻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며 약속을 통해 하나님의 전체 경영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절제를 하게 된다.

이것이 인내이다. 즉, 순종하며 살기 위해선 절제를 해야 한다.

절제하기 위해서는 참는 인내가 당연히 따라온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인내할 수 없다. 성령의 힘에 의지한 인내가 우리를 인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베드로 후서에서 말하는 믿음이 덕을, 덕이 지식을, 지식이 절제를, 절제가 인내를, 인내의 경건을

강조하다 보면 옳고 그름에 따라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경건에는 형제 우애와 사랑이 더해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12: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이 말씀을 기억하고 행하고 실족하지 말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면 재림에 대해 혼란을 겪던 그들에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 구원은 받지만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산다면 예수를 믿지 않는 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과 같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믿음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고히 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과정들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나에게 감동이 되었다.

이 과정은 절대로 혼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영을 완주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셨고

또 결국은 나는 연약하지만 완주할 것을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확신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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