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는 야고보가 쓴 공동 서신이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이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였다.
야고보서는 공석에서 성도들에게 읽히도록 쓰인 설교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서신의 수신자는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회할 때 있었던 형제, 자매들이었다.
이제는 사방으로 흩어져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야고보가
담임목사의 심정으로 서신을 쓰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 대한 핍박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서신은 그러한 핍박의 외부적 요소보다는 그들 간의 생겨나는 내부 문제들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그들 가운데 졸부들이 생겨났고 신앙은 형식화되어가고 있었으며 경제적인 이유로 성도 간의 차별이 생겨나면서
그들 사이에 사랑이 꺼져가고 있었다.
또한 서로를 향한 독설과 교제 상실까지 더해져 형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기독교가 공동체로 서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야고보는 이런 모습을 책망하며 교회가 회복해야 할 본래의 성숙한 모습을 강조한다.
야고보서는 아무리 거룩한 교회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세속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우리는 이러한 동일한 일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고로 받아 들여야 한다.
사도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라고 주장했는데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도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고 해서 겉으로 보기에 서로 대치된 주장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문맥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두 사도는 서로 다른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유대교의 주장을 향해 "오직 믿음"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에
야고보는 구원받은 자들이 지나치게 실천이나 행함을 무시하여 믿음을 단지 교리를 인정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구원받았지만 삶과 행위가 불신자들 보다 못한 모습으로 전락해 가는 자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구원을 얻기 위해 한 행동은 무용하다고 보는 것이고
야고보는 믿고 나서 그에 걸맞은 행동이 없다면 구원을 얻었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이 지목하는 "칭의"는 구원의 시작 단계 곧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 거룩함과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초기 단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말한다.
반면에 야고보는 히브리적인 개념으로 마지막 때에 궁극적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선언을 의도한 것으로
평소 삶에서 믿음을 얼마나 행동으로 실천했는지에 따라서 마지막 심판 때에 최후의 평가가 내려질 것이라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야고보는 열매도 없고 행동도 없는 그리스도인 소위 무늬만 기독교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울과 야고보의 주장은 서로 보완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관점 차이를 신학적 용어로 설명하자면 바울은 "의로움의 전가"를 말하고 있고
야고보는 "의로움의 선언"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강조점이 다를 뿐이지 균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는 동일하다.
교회 역사를 보더라도 루터의 종교개혁 때 구원에 대해 잘못된 이해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믿음의 강조를 둔 로마서 와 갈라디아서의 말씀들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었기에 루터는 야고보서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종교개혁 시대가 지나고 웨슬리 시대의 교회가 다시금 생명력을 잃어버리자 행함에 강조를 둔 야고보서 말씀이 부각되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청의의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이 요구된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야고보서의 메시지는 행함의 신학을 많이 잃어버린 현대 교회에 많은 경종을 준다.
(성경 에센스 야고보서 편 김윤희 교수 참조)
오늘은 1장을 중심으로 묵상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다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
그런 후 예루살렘 교회에서 총감독을 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주후 66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추측한다.
개론에서 설명했듯이 야고보서는 구원에 관한 기초 문제보다는 구원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1절에서 보면 "흩어져 있는 12지파에 문안하노라"고 수신자를 명시한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핍박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흩어졌고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될 것인가에 대해 전체에 걸쳐서 말씀하고 있다.
야보고서가 쓰인 배경의 시작은 바울이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당면한 할례와 음식 문제에 관한 율법에 관한 문제가
이슈가 되자 예루살렘 교회에서 최초로 종교회의가 소집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 회의의 주제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되느냐 아니면 할례가 더해져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최초 종교 회의의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그 구원은 취소되는 법도 없고
그것으로 완전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즉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였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면 열심히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를 나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시작으로 예수님의 구원은 값싼 은혜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신앙 불균형을 이룬 상황으로 인해 야고보서가 쓰인 것이다.
지금도 이런 문제는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야고보서는 잘못된 것에 머물러 있는 불분명한 신앙을 바로잡을 수 있는 이 시대에도 필요한 책이다.
야고보는 1장에서 말하고 싶었던 잘못된 신앙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 즉 고난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가 동일하게 살면서 겪게 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시험은 처음에는 별반 다르지 않게 반응하지만 시험이 깊어질수록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
다르게 반응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믿음이 없는 자는 고난 가운데 절망하고 헤어 나올 수 없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기도의 자리에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란 선물을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반응하게 되어있다.
이것이 시험을 통해 그 믿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시험을 통해 그 사람의 믿음이 증명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믿음이 마음에 심겨있는 사람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인내가 역사를 하기 시작한다.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믿음이 인내의 역사를 시작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와 너희로 온전하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온전히 구비하여 너희로 하여금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반부의 인내는 그 자체가 갖는 인내를 의미하고
후반부에 나오는 인내는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훈련과정을 통해 구비된 더 큰 온전함을 말한다.
예를 들면 자전거 경주 대회를 출전하기 위해 준비하는 운동선수가 있다면 처음에는 1시간이 걸렸다면
매일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결국에는 30분으로 줄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을 통해 인내를 온전히 구비하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시험을 통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이 올 때는 앞으로 더 성숙한 자신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험도 기쁘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하고 있다.
하나님은 구할 때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의심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라고 한다.
그리고 12절에 보면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시험을 견디는 자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13절에서 14절에 보면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시험에도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앞에 말한 시험은 test 곧 연단의 의미이고 뒤에 말한 시험은 temptation(유혹)의 의미가 있다.
자신이 유혹을 통해 받는 시험을 마치 연단을 받는 척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 받는 시험은 자기의 죄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험을 받을 때에 우리의 신앙을 체크할 수 있다.
고난으로 발현된 믿음은 기도가 되고 기도하며 인내할 때 우리는 온전해진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 의심하지 말고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는 분에게 구해야 한다.
그러면 그 시련을 통해 온전함을 이루며 그 끝에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축복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전에 시험받을 때에 이것이 내 욕심인지 하나님께서 주신 연단인지를 먼저 체크해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 욕심으로부터 시작된 시험은 회개를 해야 하고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연단의 과정이라면 내 안에 주신 믿음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연단 끝에 준비하신 축복을 기대하며 인내로 온전히 구비되어 지길 간구해야 함을 알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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