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동안 공부하고 싶었던 6장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
왜냐하면 6장 6절 말씀 때문이다.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인데 6절 말씀을 보면 구원의 진리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 문장의 흐름으로 볼 때는 이해가 되고 동의가 되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 구절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면..
그런데 오늘 CBS 히브리서 강의를 통해서 확실하게 이해돼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학적 교리로 다가서서는 안 된다.
이것을 목회적 시선으로 바라봐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당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았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그 많은 기독교인들 중에 특히 배교의 위험에 놓인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향한 서신이라는 점이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믿음을 지켰고 또 다른 이들은 배교를 했고 그중에 갈등 상황에 놓인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목회적 시선으로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교인들에게 하는 말씀이다.
예를 든다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있어서 자식이 나쁜 길로 갈 때에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다시는 보지 말자"라고 부모가 말했다고 가정하자.
부모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그 말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 부모의 진심은
"제발 옳은 길을 선택해라. 우리가 항상 너에게 말하는 것을 기억하렴. 그리고 다시 돌아오렴"이라는 말이 부모가 하고 싶은 진심의 말이다.
그러한 상황을 설정하고 이 말씀을 다시 읽으면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는 여러 시선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관점이 있는가 하면 인간이 보는 관점이 있다.
6장 4절에 보면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한 성도가 빛을 받고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 참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이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인 것 같다.
또 6장 5,6절에 보면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그리고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도 맛보았다.
그런데 6절에 보면 그러한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다시 새롭게 되어 회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이 부분이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구절이고 나도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그러면 이 타락한 사람들은 즉 배교한 사람들은 구원이 취소되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 말씀은 분명히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주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관점은 예수를 믿으면 끝까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이 말씀은 목회적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고난 가운데 믿음이 흔들리는 이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향해 저자가 말을 이렇게 거칠게 했지만
목회적 관점이므로 이것은 행동으로 옮길만한 진심은 아니다.
흔들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향한 강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6절 말씀을 신학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타락한 자" 즉 배교의 위험에 놓인 디아스포라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향해
"정신 차려!"라는 말이며 "믿음을 굳건히 지키라!"라는 강한 사랑의 표현이다.
6장 7,8절에 보면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마태복음의 밭에 관한 비유가 생각이 난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4종류의 밭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밭은 길가 밭, 돌짝 밭, 가시 밭, 옥토이다.
바른 농부라면 이 4종류의 밭 중에서 옥토에만 씨를 뿌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한국과 다른 독특한 유대인들의 농사법을 알아야 한다.
한국처럼 농지가 따로 없는 유대의 척박한 땅은 옥토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땅이 있다면 대략 씨를 아무 데나 먼저 뿌려 놓는다.
또 조금 넓은 곳이라면 나귀 등에 씨를 담은 자루를 올리고 그 자루에 구멍을 내서 나귀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씨를 뿌리게 한다.
그다음에 땅을 경작하는 방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씨앗은 길가에, 가시밭에, 돌짝 밭에 그리고 옥토에 뿌려지게 되는 것이다.
씨를 먼저 뿌리고 개간하기 때문에 농부는 개간하다 나온 돌을 한쪽에 울타리처럼 쌓아 비가 오면 땅이 쓸려 사라질 수 있는 흙이
쓸려 가지 않게 했다. 또 따로 길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가 밭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개간 후 옥토 밭엔 열매를 맺게 된다.
결국은 개간 전에는 4가지로 나눈 밭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뿌리고 난 뒤 땅을 갈아엎었기 때문에 옥토가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갈아엎으셔서 씨앗으로 떨어진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을 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땅을 개간하는 농부는 곧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 보면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라는 말씀이 있다.
밭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농부의 수고 때문이다.
고린도 전서 3장 6-7절에 보면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개간하시고 햇빛과 물을 주시고 잡초를 뽑아주는 그 수고가 있었기에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배교의 위험성을 가진 자들에게 은혜를 맛본 그리스도인들의 배교는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다고 강력하게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구원의 완성하셨지만
우리는 매 순간마다 우리의 마음을 갈아엎는 그 개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히브리서 저자가 강력하게 말하는 것도 우리의 마음을 개간하기 위해서이다.
마음을 갈아엎는 이 작업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이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단 하나의 이유는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기까지 하는 사랑의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6: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 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그러므로 저자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이다.
자신의 아들을 "단번에"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며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업으로 받은 신자가 해야 될 본분이다.
나는 이 경고의 구절을 통해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이 느껴졌다.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 있는 그들을 향한 목회자의 마음으로 권면하는 저자의 마음이 느껴져서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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