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위대한 대화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 - 요한복음 4장 1~42

차작가 2023. 10. 23. 10:16

출처: 구글이미

 

1절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 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절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절 유대를 떠나 사 다시 갈리리로 가실 새

4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절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절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1~6절

유대 지역에서의 사역이 어느 정도 활발해 지자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북쪽에 있는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다. 지도상으로 보면 유대는 남쪽에 있고 갈릴리는 북쪽에 있으며 그 중간이 사마리아라는 지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도 하지 않았는데 역사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1) 열왕기하 17:24앗수르 왕이 바벨론(현제 이라크)과 구다 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 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이래서 이방 민족들과 혼합된다.

2) 이방인들이 사마리아로 이주해 올 때 그들의 이방 신들을 가져왔다.

3) 에스라 4:2-3 사마리아에 살던 백성들이 성전 재 건축을 돕고자 했지만 바벨론에서 돌아온 스룹바벨이 거절했다. 왜냐면 의도가 불순했기 때문이다. 성경 인용 (4:1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4: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4: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이 때부터 더 골이 깊어지게 되었다.

4) 종교적으로도 차이점이 있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오경만 인정했고

이런 사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지름길인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돌아가는 상태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전혀 이용하지 않던 길인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선택하셨다.

예수님이 특별히 이 길을 택한 이유는 특별한 사건을 계획해 두셨기 때문이다. 바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 길을 선택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명에 이끌려서 유대인이 절대로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은 때로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갈 수 있어야 하고 또 자신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길을 가는 사람이다.

7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 이러라

1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7-10절

1) 예수님이 수가에 도착했을 때는 제 육시(정오)였다. 보통 해 뜰 때를 기준으로 시간을 계산하기 때문에 육시는 정오를 가리킨다.

피곤을 느끼신 예수님은 우물곁에 앉으셨다.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이시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이 시면서 우리와 같은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

그래서 우리와 같이 피로도 느끼고 배고픔도 느끼셨다.

제자들은 음식을 사러 가고 예수님이 홀로 계실 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긷기 위해 왔다. 그녀가 정오의 땡볕을 무릅쓰고 우물을 찾은 것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 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고 했어였을 것이다. 그 이유는 17절에 나와 있다.

그 여인은 이미 다섯 번의 결혼을 했고 지금은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여인이 어떻게 다섯 남편과 살게 되었는지 말하지는 않지만 추측해 볼 수는 있다.

2) 다섯 남편과 살 수 있었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첫째 경우는 다섯 남편이 모두 죽은 경우가 있다. 가능하지만 드문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할 때 29절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은 장사 지낸 일 밖에 없다. 따라서, 이 경우는 아니다.

둘째 경우는 다섯 남자와 이혼 한 경우 중에 이혼을 주도한 경우가 될 것이다. 유대 법에는 여자는 자신의 힘으로 이혼 못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외도한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경우에는 법정에 호소할 수 있고 이혼이 가능할 수 있다. 이혼 후 다시 결혼할 수 있는데 3번까지는 법적으로 결혼이 인정되고 그 이상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보면 지금 남자와 사는 사람은 정식 남편이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에 29절의 나의 행한 일은 주도적으로 이혼 한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세 번째 경우는 다섯 남자와 이혼 한 경우 중에 이혼을 당한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다.

(성경 인용, 신명기 24:1,2절을 보면, 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24:2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

이혼할 수 있는 조건은 먼저 남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을 때 바람을 피웠다든가, 도둑질을 하든, 사기를 쳐서 남편의 명예를 실추 시켰다는가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가 기쁨이 되지 못할 때 주관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게으르다든지, 자녀 교육을 잘못 시킨다든지) 이런 경우로 아마 다섯 번 이혼 당한 경우일 수 있다. 이런 경우 29절의 나의 행한 일은 어떻게 보면 남에게 말하기가 꺼려지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은 실제로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마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이 이 여자를 가리켜 죄인이라든지 부도덕한 여자라고 지적한 적이 없는 것과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이 여성은 다섯 남자로부터 버림 당한 이유는 간음한 것이 아니라 기타 다른 이유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혼을 주도적으로 했든 아니면 일방적으로 당했든 간에 현재 이 여인의 삶은 행복하지 않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물을 좀 달라고 하시며 말을 거셨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적대감으로 인하여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러한 요청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남자가 공공장소에서 여자에게 말을 건넨 것은 이상히 여길 일이었다. 그래서 27절에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부정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쓰는 것들은 만지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은 그 여자의 그릇에 담긴 물을 마시려고 했던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9절에서 그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10절에서처럼 대답하신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네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았다면 하나님의 선물을 구했을 것이요 하나님의 선물로 생수를 얻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생수의 근원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자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시다.

좋은 생수의 조건들이 있는데 그 첫 번째 조건이 병에 대한 치료 능력이다.

좋은 생수의 두 번째 조건은 생명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좋은 생수를 마시면 우리의 생명력이 더 확대되고 활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이런 치료의 능력과 생명 에너지를 갖는 생수가 필요함을 알고 계셨고 생수를 줄 사람은 오직 예수님 자신임을 알기를 원하셨다.

그렇다면 그 여인에겐 왜 이 같은 생수가 필요할까?

그 여인이 다섯 번 결혼하고 현재 여섯 번째 되는 사람과 사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그 여인은 왜 다섯 번씩 결혼하고 또 현재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을까?

먼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당시에는 이혼한 여자는 경제적으로 혼자 살수 없어서 어떻게 보면 할 수 없이 재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혹시 이번 남자는 괜찮을까라는 희망을 계속 가졌을 가능성이다. 계속되는 결혼의 실패는 그녀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재혼할 때마다 좀 더 나은 결혼 생활이라는 희망에 대한 갈급함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그 여인은 영적인 치료와 새로운 힘을 가질 필요가 있었고 목마르지 않게 하고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생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녀 자신은 이런 심각한 상태를 모르고 있는데 우리 하나님은 그녀에게 진정 무엇이 필요한지를 너무도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 무더운 오후의 땡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 여인을 치료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찾아오셨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시다. 우리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때에 따라 채워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11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절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15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으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

16절 이르시되 가사 네 남편을 불러오라

17절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절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11~18절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여인은 자신의 생각대로 생수에 대해서 말한다.

11절에 보면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물을 퍼 올릴 도구도 없고 우물도 깊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예수님이 ‘물’을 주신다는 말은 불가능해 보인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인은 우물을 판 자랑스러운 조상 야곱을 언급하면서 ‘그렇다면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큰 사람입니까’라고 묻는다.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생수는 야곱이 준 것(야곱이 판 우물을 지금까지도 그 후손을 먹이는 대단한 우물인데) 이 우물 보다 더 많습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영적인 생수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야곱의 우물물과는 달리 갈급한 영혼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먹는 사람은 그 속에서 생수가 계속 솟아날 것을 약속하신다.

그러자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심하는 태도와 함께 아직까지 그 생명수가 어떤 물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지만 물길으러 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단 예수님께 그 물을 구했다.

16-18절

이같이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영적 상태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인 생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16절처럼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다.

느닷없는 예수님의 명령에 놀란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다.

여인의 대답은 한편으론 진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은폐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예수님은 여러 이유로 다섯 명의 남편으로 버림받고 당시에도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그녀의 실태를 정확하게 지적하셨다.

이 의미는 영생의 은혜를 누리려면 자신의 죄를 낱낱이 드러내고 인정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치유받기 위해서는 숨겨둔 죄가 말씀되신 예수님 앞에 다 드려내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9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19절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의 인생의 비밀을 아는 예수님께 선지자라고 고백을 한다. (4: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1) 사람은 자신의 잘못 등 살아온 인생을 드러내는 예수님의 지적에 크게 2가지의 형태로 반응한다.

첫째, 기분 나빠하고 더 이상같이 하고 싶지 않은 반응한다. 대체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둘째, 이 경우처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반응을 한다. 믿음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이 여인은 믿음의 씨앗이 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2) 이 여인의 본심: 예배를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싶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라는 질문에서 여인이 믿음이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1) 요지는 "어디가 참된 예배 장소입니까? 저는 하나님께 진실된 예배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헷갈립니다. 우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 산 (그리 심산)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하고 당신과 같은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활을 계속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혹시 하나님을 잘못 예배하는 데 있지는 않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못된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을 것이고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걱정이 됩니다."라는 의미이다.

2)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 심산에서 예배를 드린 배경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 유대 사람들이 자신들을 짐승 취급하면서 성전의 접근을 막자 자기들 나름대로 그리심 산에다가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렸었다. 그리고는 그리심 산에 있는 성전이야말로 진짜 성전이라고 우겼다. 왜냐하면 신명기 12장에서 하나님은 한 장소에서만 예배를 받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3)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점령하고 가나안에서 처음 제사를 드린 곳이 바로 자기네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 산 옆의 에발 산이고 예루살렘에 지어진 성전은 그로부터 500년 후인 솔로몬 때이므로 자기네 제단이 맞는 것이라고 우겼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 산도 바로 그리심 산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은 북 이스라엘이었던 사마리아에 지어진 제단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사마리아 땅에 지어진 제단의 계보를 일관성 있게 연계하여 기록함으로 그 제단은 우상 숭배의 표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그리심 산의 예배는 우상 숭배의 줄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 산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그리심 산은 아니다.

그렇다면 적합한 예배 장소가 아닌 곳에서 예배드리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심 산이 틀리고 예루살렘의 시온 산이 맞다’라고 대답을 해 주셔야 맞지 않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21절처럼 일단 ‘내 말을 믿으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제는 그 문제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주님은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의 시온 산도 아니라고 하셨다. 물론 예루살렘에서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여 주신 제사였다. 그러나 그제사는 진정한 제물이시며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깨닫고 그 은혜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 행위를 의지해서 ‘자기의’만을 쌓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만을 위한 다윗 왕국을 재건해 주실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님은 ‘그 예배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대답을 통해 구약의 제사 자체를 폐하고 계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신약의 예배라는 것은 장소나 방법에 의해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계신 것이다.

(요한복음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애배할 지니라

25절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22~26절

1) 어떻게 예배를 드리는가도 중요하지만 먼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해 주셨다.

2)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께 나아 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본질상 영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장소에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영적인 예배로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란

여기서 영은 성령을 말한다. 따라서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성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뜻이다. 육신에 속한 인간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신령한 세계를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격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는 마땅히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진리로 드려야 한다. 진리란 뜻의 헬라어 ‘알레떼이아’라는 단어는 헬라어 문헌에서 ‘실체와 본질’이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는 단어이다. 그 단어는 그림자나 상징이나 예표와 반대되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 ‘알레떼이아’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이 땅의 것으로 예표가 되었던 모형과 상징과 그림자의 실체와 본질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이제 구약의 예표적 예배가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쓰인 단어인 것이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여인 앞에 그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 것이다. 그리고는 그 여인에게 ‘너희는 이제 그림자나 모형이 아닌 실체로 예배를 드려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권고를 하심으로 ’지금까지는 너희가 예배의 모형과 그림자를 통해 예배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면 이제 그 실체인 내가 너희의 제물이 되고 제사장이 되어 제사를 다 드렸으니 너희는 그 실체인 십자가를 근거로 예배를 하라‘는 것이다.

신령한 예배란 중생한 성도의 영이 성령을 힘입어서 영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이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성도의 영이 성령을 힘입어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와 영적 교통을 하며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에 복종하며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가 영적 예배요, 성도의 영이 사는 예배이다.

 

요약:

사마리아 여인은 자의든 타의 던 간에 한두 번도 아닌 다섯 번이나 버림을 받은 여인이었다. 그 인생이 얼마나 공허했을까? 그 인생의 상실감과 좌절감은 또 얼마나 컸었을까?

이렇게 공허하고 상실감과 좌절감으로 지쳐있는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되신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셨다.

여인은 죄인임을 지적 당하고 나서는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죄를 깨닫는 것과 예배와는 상관이 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초자연적 지식에 놀라 이제 겨우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았다. 그 여자는 중심에 있어서 이제부터 종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간은 초자연(하나님)을 접촉하기 전에는 진정한 종교심과 영적 사색을 가져보지 못한다. 그 여자는 이제부터 정상적으로 예수님에게 돌아오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단지 지나가는 유대인이 아니라 선지자 같은 사람임을 알고는 선지자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평소에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에 대해 질문한다.

죄를 깨닫는 자는 예배를 사모하게 되어 있다.

사마리아인들은 조상들의 행한 것을 선례로 택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했다. 비록 이 여자는 그때까지 자기 백성의 전통을 따라 행했으나 그것으로 만족이 없었다. 여기서 예배란 아무런 종류의 예배를 다 포함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예배란 제사와 관련된 예배로서 공적으로 엄숙하게 표현하는 신앙의 행위를 가리킨다.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았기 때문에 평소에 해결하지 못하고 나오던 중대한 문제를 묻기로 하였다. 그것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참 예배가 되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사마리아인들은 주전 400년경에 사마리아 그리 심산에 다 성전을 세우고 거기서 예배를 드려야 정당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성경을 모세 오경만 믿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본래부터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여자는 참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한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예배에 대해 무지하게 된 것은 사마리아 들은 오직 모세 오경만을 인정하고 역사서나 선지서 등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구약의 제사가 그림자와 의식적인데 비하여 그것들의 실체요 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드리게 될 것을 가리킨다. 또 이 진정이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알레데이아인데 진리라는 말이다. 즉 진리로 예배드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성도의 영이 성령을 힘입어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그리스도와 영적 교통을 하며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에 복종하며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가 영적 예배요, 성도의 영이 사는 예배이다. 하나님을 영으로 섬기려면 먼저 기도를 많이 하여 중생한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영의 세계를 찾아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다음에는 바른 진리를 찾고 좀 더 깊은 진리를 계속 찾아서 들어가야 한다.

참 예배자는 예수님이 참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아는 자이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예수님을 통한 예배를 말한다.

사마리아 여자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자였다.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해 주고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었다.

아마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이러한 마음이 있는 것을 아시고 구원하기 위하여 그 동네로 가실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심리가 이제 진정한 종교로 바로 움직이는 것을 보시고 그 기회를 타서 자기가 메시아인 신 것을 알려 주신다.

이렇게 사모하여 고대하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심령을 열어 주시고 당신을 밝히 알도록 해 주신다.

결론: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방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떤 이유로 이 여인을 택하였을까? 아마도 이 여인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이 없었고 또 이런 사람도 생수 되신 예수님만 만나면 얼마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그를 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대부분 사람들 중에 아무리 어렵고 힘든 산전수전을 겪었거나 아니면 지금 말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이 여인보다 더 어려운 인생을 산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자의든 타의 든 간에 한두 번도 아닌 다섯 번이나 버림을 받은 여인이었다.

그 인생이 얼마나 공허했을까? 그 인생의 상실감과 좌절감은 또 얼마나 컸을까?

이렇게 공허하고 상실감과 좌절감으로 지쳐있는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되신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셨다.

혹시 목이 마르고 갈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 있다면 생수 되신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좌절하고 지쳐서 이젠 완전 목이 말라버린 분이 있다면 예수님을 찾으시길 기도한다. 그리고 그 예수님만 붙들면 우리의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항상 흘러넘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