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의 한계
사람이 나름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데, 그 모든 판단의 기초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잘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보는 데 한계가 있다. 일단 멀리 보지 못하며 또한 가까이 있는 것도 보지 못한다. 우주처럼 큰 것을 볼 수 없고 세균처럼 미세한 것도 볼 수 없다. 이것을 제대로 보려면 망원경이나 현미경과 같은 도구를 이용해야 한다. 태양과 같은 밝은 것도 보기 어렵고 암흑 같은 어두운 것도 보지 못한다. 시야를 차단하는 장애물이 있으면 그 건너편에 있는 물건을 보지 못한다. 내 몸인데도 불구하고 내 몸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병이 자라고 있는지도 잘 보지 못한다.
1) 인간의 눈은 동물에 비해 한계가 있다.
보통 인간의 시력은 2.0 몽골과 북극권 사람의 시력은 보통 3.0-4.9 몽골 사람들이 시력이 좋은 이유는 시력을 타고난 덕택이기도 하지만 항상 초원의 푸른색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하는 탓이라고 한다. 목축이 생계이다 보니 먼 곳에 있는 늑대를 구별해서 쫓거나 잡기 위해서는 멀리 보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매와 수리의 망막에 민감한 부위에는 150만 개 정도의 시세포가 분포하고 있다고 하니,
약 20만 개의 시세포를 지닌 인간의 눈에 비한다면 어림잡아도 7배의 높은 시력을 가지고 있다.
2) 인간의 눈은 판단을 제대로 못한다.
모든 비행 조종사들은 두 가지 조종법 중에 한 가지를 사용한다. 그중에 하나는 시계비행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계기비행이다. 모든 비행 조종사들은 반드시 둘 중에 한 방법을 사용해서 비행기를 조종하게 되어 있다. 이름은 어렵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시계비행은 말 그대로 ‘볼 시’자 보는 대로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이다. 저기 산이 있으니 고도를 조금 높여야겠다하고 고도를 눈으로 보면서 조종하는 것이 시계비행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조종 기법이 있는데 그 기법을 계기비행이라고 한다. 이 기법은 자기가 보는 것을 의지하지 않고 계기판과 관제탑의 지시에 철저히 순종하면서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법을 말한다. 내 눈에는 활주로가 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기판에서 현재 활주로까지의 거리가 1.5킬로라고 하면 그 계기판을 믿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지금 요 정도 높이면 저 산을 넘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계기판에서 지금 저 산과 추돌 가능성이 있으니 고도를 300미터를 더 높이라고 ‘삑삑’거리면 그대로 계기판의 지시에 따라 고도를 300미터 높여 비행기를 조종하는 기법을 계기비행이라고 한다.
모든 전문 파일럿들과 전투기 조종사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계비행이 아닌 계기비행기 법을 사용한다.
야간비행 시 반드시 계기비행하라고 한다. 왜냐면 하늘과 바다가 구분이 잘 안되기 때문이다. 특히 바다에서 어선들이 불을 켜고 작업을 할 때는 어선의 불빛이 하늘의 별들과 혼동이 된다. 비행기가 계기상으론 뒤집어져 있는데 자기 느낌으론 그 어선의 불빛이 하늘의 별로 착각하고 비행기를 위로 상승하면 바로 바다에 처박힐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의 보는 능력이 이렇게 불완전하고 보잘것없고 또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된다. 1시간 전에 가족들과 헤어져서 교회에 왔다. 나는 그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 시간 후면 이 교회로 오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믿음이다. 이처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식의 대상일 뿐이지 인식의 범위 너머에 있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와 똑같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온전하게 인식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인간의 제한된 시력과 청력으로는 온전히 하나님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믿음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시는 것이다. 즉, 믿음을 떠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립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에 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실상은 ‘기초’를 뜻하고 ‘증거’는 확신을 뜻한다. 즉, 이 말은 소망하는 것들의 기초가 믿음이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내적 확신이 믿음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24절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절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절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절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2. 본문에서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명인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았다는 증언을 듣고서도 자신이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도마는 자기 눈으로 예수님의 못 자국을 직접 보고, 자기 손가락을 그 못 구멍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견해와 증언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교만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참된 증언에 겸손하게 귀 기울일 때 경험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그 말을 한지 일주일이 지나고 8일째 특히 도마를 염두에 두고 도마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도마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를 믿음의 길로 들어서도록 권면하신다.
27절: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제서야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된다.
28절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이런 고백을 하는 도마를 향해 도마의 고백에 칭찬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29절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참으로 타당한 말씀이시다. 왜냐면 사람들은 도마처럼 본 것 만을 믿으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눈으론 막상 중요한 것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건물에 들어갔을 때 그 건물을 유지하거나 지탱하는 철근이나 콘크리트들은 일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은 나무로 만든 벽이나 타일과 같은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뿐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나무 벽이나 타일은 건물을 유지하는 실체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내부를 장식하는 재료일 뿐이다. 이처럼 인간의 눈으로는 진짜 중요한 것을 볼 수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쉬운 성경 번역으로 ‘믿음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감추어져 있어서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하시던 광경을 보지 않고도 믿는다. 믿음이 바로 이렇게 보지 않고 믿는 것을 말한다.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절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 보는 것으로 산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증인 이야기
1) 히 11: 7- 노아
노아는 나이가 480살 되던 해에 온 땅에 홍수가 임할 것이니 방주를 예비하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다. 온 세상을 뒤덮는 홍수는 과거에도 없었고 노아의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경외심을 가지고 방주를 지었다. 120년 동안이나. 창세기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
맑은 하늘 아래에서 온 세상을 뒤덮은 홍수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믿고 방주를 짓는 것을 볼 때 그 같은 일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세상 사람들은(보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들) 어리석게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대로 홍수는 임했다. 그리하여 노아를 조롱했던 온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던 노아는 방주를 예비함으로써 멸망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믿지 않고 비록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결국 도마처럼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사람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약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어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주님께서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보지 못하는 한계를 인정하는 데부터 시작한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데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요약: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는 증언을 듣고서도 믿지 못했다. 도마는 자신이 직접 보지 않은 사실을 믿지 못한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도마가 그 말을 하지 8일쩨 특히 도마를 염두에 두고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도마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를 믿음의 길로 들어서도록 권면하셨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보라며 그리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제서야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다.
도마는 " 나의 주님이시오 나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그런 고백에 예수님은 칭찬보단"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신다.
결론:
히브리서 기자는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쉬운 성경으로 '믿음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이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감추어져 있어서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창조하시던 광경을 보지 않고도 믿는다. 믿음이 바로 이렇게 보지 않고 믿는 것을 말한다.
도마처럼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사람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약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수 있겠는가? 약 3500년 전 홍해에 있지를 않았는데 홍해가 갈라졌다는 성경의 증언을 어찌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 보고서야 믿겠다는 사람에게 성경이란 믿음과는 전혀 무관한 단순한 인쇄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지 못했고 또 보려 해도 볼 수 없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믿음 속에서 모든 것은 확실하게 보이게 된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무덤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것도 믿음 속에서는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는 오직 믿음으로만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르게 믿을 수 있도록 인식의 근거를 먼저 주신 것이 바로 성경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만 한다.
우리가 나의 삶을 나의 마음대로 통제하겠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삶을 살아왔다면 우리는 시계비행하며 우리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내 눈에 보기에 옳아 보이고, 내 눈에 보기에 편해 보이고, 내 눈에 보기에 더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살았다면 시계 조종법으로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그 길이 고난의 길처럼 보이고 심지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나의 삶을 맡겨 드리며, 하나님의 통제권 속에 있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분은 계기비행하며 살아온 것이다.
이젠 결정해야 한다. 보이진 않더라도 믿음으로 온전히 주님만 그리고 말씀만이 우리의 삶을 바르게 비행하게 할 계기비행법이라고 믿고 택해야 한다. 이것이 보지 않고도 믿는 그런 복된 삶인 걸 오늘 말씀은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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