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1: 사람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정결한 교회) - 요한복음 2장 13-22절

차작가 2023. 11. 2. 10:46

 

13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절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절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절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고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절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절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1. 성전 청결 사건은 예루살렘에서의 첫 번째 사역이다. 우리는 대부분 성전 청결사 역을 한 번으로 보지만 사실은 성전 청결 사역은 두 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에는 이 성전 청결의 사건이 서두에 등장하지만 다른 공관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마지막 주간에 일어난 일로 기록이 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두 번 있었던 것으로 본다. 20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그 성전이 46년 동안 지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그 헤롯 성전은 헤롯이 유대민족들에게 호의를 사기 위해 BC20 년에 재건을 시작해서 AD63년 알비누스 총독 때 완공 된 성전이다. 그리고 AD70년에 로마의 타이터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가 된다. 그렇다면 그 성전이 재건되기 시작한 지 46년 째 되는 해는 AD26 년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BC3년이나 4년경에 태어나셨으니까 (헤롯이 죽은 해가 BC3년) AD26년에 주님의 나이는 31살이 된다.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의 성전 파괴 사건은 예수 님 공생애 말기의 일이 아니라 예수 님 공생애 초기의 일이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소란케 하신 사건은 공생애 초기에 한 번, 그리고 공생애 말미에 한 번 이렇게 두 번 있었던 것이다.

2.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들은 매년 3번 절기 (출 23:17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무교절이라고 하는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때마다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순례를 떠나야 했다. 그 것은 선민 이스라엘의 명문화 된 규례였다. 그런데 그 때는 이스라엘 장정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 개종한 사람들과 아직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이방인들도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약 2백7십만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밖에다 천막을 치고 일주일 동안 유숙을 했다고 한다. 유월절에는 2백7십만의 사람들의 순례자들이 25만 마리의 양을 잡아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그 때 잡혀 죽게 될 양들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문이 ‘양 문’이었다.

그런데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 온 그 순례 객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에 ‘속전(贖錢)’이라 불리는 성전 세를 내야 했다.

성전 세는 유대 화폐로 반 세겔이었는데 반 세겔은 당시 노동자 이틀 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런데 당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뿐 아니라 식민지 유대 땅에 사는 유대인들도 모두 로마의 화폐나 헬라의 화폐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로마나 헬라의 화폐에는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유대교의 성전에서는 그 돈을 받지 않았고 성전 세는 오직 ‘세겔’로만 받았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자신들의 돈을 ‘세겔’로 바꿔야 했다. 그래서 절기 때가 되면 성전 마당과 부근 감람 산 일대에 환전상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환전상들을 관장하는 기관이 바로 산헤드린 공의 회였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의회는 절기 때마다 환전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반 세겔을 바꿔 주는데 반 세겔의 50%를 수수료로 받았다고 하니까 상상만 해도 엄청난 돈을 축척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순례를 온 유대교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야 했다. 그 때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을 바쳐야 했다. 그런데 순례를 오는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 집에서 실한 가축을 끌고 와도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살이 빠지고 흠도 나고 해서 불합격 판정을 받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성전 부근 감람 산 일대에 네 곳의 가축 시장이 있었고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까지 가축을 파는 가축상들로 붐볐다고 한다. 그 가축상들을 주관하는 사람이 대 제사장이었다. 그래서 자기가 관장하는 가축 시장의 제물이 아니면 수시로 불합격 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멀리서 오는 사람들이 아예 집에서 가축을 가져올 생각을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대 제사장의 무리들은 거기서도 엄청난 재물을 축적할 수 있었다. (환전+제물=1억 7천만 달러)

지금 성경이 그러한 성전을 등장시키며 웅변적으로 역설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 하에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성전을 이윤 추구의 장소로 만들어 버린 죄인들을 총체적으로 상징하기 위함인 것이다.

바로 그 현장에 참 제물이신 주님이 들어가신 것이다. 그러고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그들을 다 쫓아내셨다. 모형이 물러가고 실체가 들어서는 순간인 것이다.

(그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유월절 어린 양으로 바쳐지는 제물과 그 제물이 바쳐지는 곳인 성전과 진짜 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한 번에 만나는 것이 바로 이 성전 청결 사건이다. 쉬운 말로 모형과 실체가 함께 만나 모형이 파괴되고 실체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사건이 바로 이 이야기이다.)

성전은 기도하는 하나님 아버지 집이기 때문에 청소하신 것이다. 오늘 날에도 예수님의 채찍에서 자유롭지 못한 교회와 교인이 많다.

산헤드린 공의회의 관청이 바로 그 성전 마당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 소란을 듣고 나와 예수님께 항의를 했다. 본문 18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사람은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밖에 없다. 네가 메시아가 맞다 면 우리가 놀랄만한 표적을 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표적을 한 번 보여 보아라’ 라고 대들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대단한 기적을 일으키며 등장할 것이라는 것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정말 예수님이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그렇게 요구한 것일까? 아니다.

본문 18절의 ‘유대인들이 대답하여‘는 어떤 요구나 항변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관용적 표현으로 ‘대들었다’라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이 주님이 정말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면 그렇게 무례하게 대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똑같이 말씀을 하셨다.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라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강력하게 대드신 것이다.

오직 자기들의 이윤 추구만을 목적으로 한, 형식뿐인 종교 행위에 대해 질책하시는 주님의 모습과 주님의 그 지적을 못마땅해 하며 그 분을 죽이려고 이를 악무는 그 현장의 모습 속에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비단 저만의 과민반응일까?

주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를 들으시고는 그들에게 외치셨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다. 19절에서 쓰인 ‘성전’이라는 단어는 ‘나오스’이다. 그 단어는 14절에 나오는 ‘성전’ ‘히에론’과 다른 단어이다. 14절에 쓰인 ‘성전‘’히에론‘은 성전 전체의 외형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당시 사람들은 ’성전‘하면 ’성전과 성전 뜰, 그리고 그 부근의 감람산 일대까지‘를 포함해서 ’성전‘이라 불렀다. 그 때 쓰이는 단어가 ’히에론‘이다.

반면에 19절의 ‘성전’ ‘나오스’는 거룩한 성전 건물 자체만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이다.

그 단어는 요한 계시록 2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였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 3장에서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도들’을 가리킬 때 ‘나오스’라는 단어를 썼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건물로서의 성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21절의 요한의 부연 설명처럼 성전이신 자신의 몸을 ‘헐라’고 하신 것이다.

거기서 ‘헐라’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뤼사테’라는 단어인데 ‘파괴하다’라는 뜻의 명령형 동사이다. 그러니까 그 말은 ‘너희가 나를 파괴하라’라는 뜻이다.

그러고는 이어서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라고 대답을 하셨다. 거기서 쓰인 ‘일으키리라’

‘에게로’는 ‘다시 살리다‘라는 뜻의 미래 직설법 능동태 동사이다.’스스로 다시 살아나리라‘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주님은 ’너희가 나를 파괴하면 내가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표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나를 파괴하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라고 대답을 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와 흡사 한 상황을 마태복음에서도 보았다.

(마 12:38-40)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쓰인 단어와 표현 방법만 다르지 똑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도 주님은 이 땅에 기적을 일으키러 오신 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죄인들에게 닫힌 하늘을 열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일으키신 모든 표적들은 전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결론지어진다. 그러나 우매한 죄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주님은 이 일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날까지 유대인들의 조롱을 받으셨다. 17절 말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결론:

정리를 하자면 지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키시는 사건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유익만을 챙기려 하는 유대교로 대표된 죄인들의 행태 자체를 파괴하시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전의 파괴라는 모형을 통해 그 더럽고 형식적인 성전이 되셔서 죽으셔야 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암시하고 계신 것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형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옛 성전이 되셔서 파괴가 되시고 다시 새 성전으로 부활하셔서 이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열매를 맺는 참 성전이 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전 파괴의 사건이다. 그래서 ‘성전 청결 사건’을 ‘성전 파괴의 사건’ 이라고 명명해서 부른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일련의 사역 속에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고 일을 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성도들도 성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데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우리는 옛 성전 안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들처럼 계속 죄만 짓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무상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 나의 마음 안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고,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그러한 것들을 깨끗이 치우고, 청소하는 신앙의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적용:

우리는 왜 예배당에 나올까? 정말 하나님이 좋아서 그 분의 은혜가 감사해서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그 하나님이 신앙의 중심이 아니라 우리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힘을 빌리기 위해 나오는 것일까?

유월절과 유월절 어린 양으로 바쳐지는 제물과 그 제물이 바쳐지는 곳인 성전과 진짜 제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한 번에 만나는 것이 바로 이 성전 청결 사건이다. 쉬운 말로 모형과 실체가 함께 만나 모형이 파괴되고 실체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사건이 바로 이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또 한 번 성전 청소를 하셨다. 그것은 그 만큼 성전 청결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어디서 부터 개혁하실까? 교회이다. 성전이 타락한 것은 예배의 본질을 잃어 버린 것이고, 성전을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제 실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감으로 우리가 먼저 깨끗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또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결한 교회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