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절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3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38절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절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누가복음 5: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방하고 있는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었다. 그런데 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이토록 공개적으로 비방을 하고 나섰을까? 하나님은 지금 묵은 것을 좋아하는 죄인들의 속성을 폭로하고 계신 것이다. 거기에선 세례요한의 제자들일지라도 자유로울 수가 없더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심지어 세례요한까지도 감옥에 갇혀있는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며 ‘오실 이가 당신이 맞습니까?’라고 물을 정도였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세례요한은 구약 적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금식이다. ‘왜 우리는 금식 일에 금식하는데 너희는 먹고 마시느냐? 그것도 세리의 집에서?’이다. 우리도 알다시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다.
율법에는 일 년에 단 한 번, 대 속죄일에 금식을 하라는 규례가 기록이 되어 있다.(레 23:27,29,32) 레23:27 일곱째 달 열흘 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금식이라는 것은 인간의 육신에 에너지 공급을 중단하는 것으로서, 육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금식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들의 처음 자리, 즉 죽은 흙의 자리를 직시하고 수긍하는, 쉬운 말로 인간존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난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행위가 금식이다.
대 속죄일의 금식은 그렇게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 앞에서 인간은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꼭 붙드는 순종과 자기 부인의 행위로 요구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기특하게도 일 년에 한 번만 하면 되는 금식을 계속 늘려 갔다. 스가랴서에 보면 이스라엘이 성력으로 4월과 5월, 7월과 10월에 각각 어떤 날을 정해서 금식을 해왔다는 사실이 기록이 되어 있다. 그건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 늘려간 것이다. 그게 계속 늘어나다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인들, 심지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의 제자들까지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다. 그건 율법도 아니었고 그저 장로들의 유전이다. 하나님이 일 년에 한 번만 하라고 요구하신 금식을 매주 두 번으로 늘려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했다. 문제는 그들이 금식을 통해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들의 경건함을 자랑했고, 이방인들과의 구별됨과 차이성을 드러내려 했다는 것이다. 그건 밥은 굶기는 굶는데,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양으로 율법을 지킨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속죄의 은혜 앞에서 너희들의 처음 자리를 확인하고, 너희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여 자기를 부인하라’는 의도로 금식을 명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우리는 이렇게 도에 지나는 금식까지 함으로 해서 하나님도 감동하시는 기특한 일을 하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자기 영광 챙기기와 자기 가치 챙기기의 일환으로 금식을 했던 것이다.
물론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는 좀 다른 의미로 금식을 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오실 메시아에 관해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메시아를 맞기 위해서는 금식이라는 자신들의 기특하고 경건한 행위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금식을 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금식이라는 행위를 자랑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율법의 행위가 메시아를 맞이하는 자들의 최소한의 예의이며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율법주의이다.
아무튼 그렇게 자신들이 힘들게 금식을 하고 있는 바로 그날, 예수라는 분이 제자들과 함께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이다. 그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비방하고 나섰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당신을 비방하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의 비유 말씀이다.
본문 말씀 34절을 잘 보면 예수님은 당신을 혼인잔치의 신랑으로 표현을 하신다. 혼인잔치의 신랑과 함께 있는 이들이 어떻게 금식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구약의 금식이라는 것은 혼인잔치에서의 신랑과의 잔치 누림까지로 가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었지 신랑이 함께 있을 때에는 전혀 무용한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금식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데에 필요한 몽학선생인 것이지, 그것 자체에 어떤 효능이나 효과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금식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신랑이신 예수가 그 모든 것을 완전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예수님의 공로를 은혜로 꼭 붙들기만 하면 된다는, 그 은혜의 복음으로 우리를 인도케 하기 위해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롬 3:20)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신약에 와서는 먹고 마시는 것, 즉 금식이나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분 같은 율법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건 단지 예수가 오실 때까지만 어떤 교훈을 위해 주어졌던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경이 우리 성도의 인생 전체를 금식의 삶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신 8:1~3)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 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의 이유가 적혀있는 구절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광야라는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과정으로 겪어야 하는 ‘인생’을 총칭하는 것이다.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명명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의 설교에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광야교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내야 하는 인생 전체가 바로 광야이다. 그런데 이 구절 속에 이스라엘의 그 광야 인생의 이유와 목적이 한마디로 요약이 되어 있는데, 그것이 ‘낮추시고 시험하고 주리게 하심’이다. 그러니까 성도의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낮추어지고, 시험당하고, 주려 죽는 삶이어야 맞는 것이다. 주려죽는다는 것은 옛사람의 아사(餓死)를 말한다. 여기에서 낮추시고 주리게 하신다는 히브리어 단어가 ‘라에브, 아나’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레위기의 속죄일 규례에 그대로 등장한다.
(레 16:29) 29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 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여기에서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라는 어구에 쓰인 단어가 신명기 8장에 쓰인 히브리어 ‘아나’이다. 이스라엘의 대 속죄일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일은, 금식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레위기의 속죄일 규례와 신명기 8장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성도의 인생은 금식의 삶인데, 그 삶은 스스로를 낮추게 되는 삶이고, 시험을 당하는 삶이며, 옛사람의 아사, 즉 주려죽음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 ‘나는 죽은 자에 불과하니 하나님의 은혜로 나를 덮어 주세요.’라는 고백으로 드리는 것이 ‘금식’이라는 종교 행위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전 인생이 요약이 되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행위가 금식이다.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 이 세상의 왕으로 살고 싶어 했던 옛사람이 금식의 삶으로 굶어죽게 되면, 그때부터 자기에게 쏟아 부어지던 이기적 사랑이 하나님과 다른 이웃에게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이사야서에서 진짜 금식의 내용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밝히고 계신다.
(사 58:4~8)
58: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8: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58: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일까? 자신을 스스로 괴롭게 하여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주리고 헐벗고 약한 자들을 내 것을 털어 섬기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삶에서 완전히 돌이켜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 자아가 비워지고, 자아가 죽는 삶을 금식이라 하는 것이다.
이 구절들을 잘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할 수 있는 자는 먼저 상기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자여야 한다. 그가 먼저 그 능력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하나님이 거기에 복을 주고, 능력을 더 붓는 방식으로 금식이 설명되어 있다. 이 세상에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다. 성경에는 분명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명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는데, 과연 그 누가 있어 스스로를 괴롭게 함으로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롭게 하고, 모든 멍에를 꺾고, 흉악의 결박을 풀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러한 금식을 예수님이 하셨다. 예수님이 그분의 공생애와 십자가를 통해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신 것이 40일 금식이다. 40일은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함축한 상징적 기간이다.
예수님의 40일 금식과 시험은 예수님의 전 생애를 요약하여 보여준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보다 먼저 낮추어지셨고, 주리시고, 시험을 당하셨다. 그러고는 유일하게 그 주리고, 낮추어지고, 시험을 당하는 현장에서 하나님이 출제하신 시험지의 답안에 정답을 쓰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이렇게 신명기 8장의 광야 인생의 목적인 금식을 예수께서 온전히 성취하시고, 그 금식의 삶을 우리 성도들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이다. 우리 성도는 바로 그 예수의 금식을 내 것으로 거저 받아 금식을 한 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은 또 다른 금식이 필요 없는 자들이 된 것이다. 그게 새 포도주이고 새 옷이다.
그러면 그 새 술과 새 옷의 주인공들이 일차적으로 누려야 할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이제 우리 신랑이신 예수님의 덕분에 더 이상 주리지 않아도, 금식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구나.’하며 신랑이 베푸신 혼인잔치를 즐기는 것이다.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감격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 신랑이신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를 배우기 위해, 우리의 인생 속에서 연일 실패되는 금식의 삶, 즉 절대 주려 죽지 않고 있는 나의 옛사람을 인식해야 한다. 또 조금도 낮아지는 것 같지 않은 나의 옛사람을 경험하면서, 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금식의 삶을 거저 주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배워야 한다. 그럴 때 예수님의 주려죽음과 예수님의 낮추어지심을 믿음으로 면목 없이 붙드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 대한 신뢰가 깎여갈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자격, 우리의 열심, 우리의 공로, 세상의 가치와 힘 등을 부인하고 부정하게 되는 것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서서히 주려 죽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나 세례요한의 제자들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 옛사람을 주려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실패함으로 해서 옛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새 술을 담은 새 부대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시키시기 위해 율법에 금식이라는 것을 명해 놓으셨다. 이스라엘은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금식을 함으로 해서, 자신들의 처음 자리, 죽은 흙의 자리를 확인해야 했고, 그러한 처음 자리의 현실을 직시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온전히 구하는 그러한 자리로 낮아져야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처음 자리를 확인하기는커녕 오히려 금식 일을 하루하루 늘려가면서 자신들의 가능성을 자랑했다.
그러한 자기 영광 챙기기, 자기 가치 챙기기, 자기 자존심과 자랑 챙기기가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한 더러운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것이다. 그들이 지켜야 할 진정한 금식을 예수의 삶과 십자가를 통해 온전히 이루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공짜로 금식의 삶을 허락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금식의 삶, 즉 광야의 삶을 통과해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 금식의 삶은 필수이다. 그런데 그 금식의 삶을 주님이 거저 선물해 주신 것이다.
금식의 삶은 말씀드린 대로 육의 죽음이라는 삶이다. 그런데 그 육이 좀처럼 죽지 않는다. 하지만 성도는 이미 금식의 삶을 살기로 작정이 되어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 속에서 금식의 삶, 즉 옛 자아, 육의 죽음의 삶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격발이 되어 나와야 한다. 그러한 딜레마 속으로 하나님의 지혜가 가입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금식의 삶, 옛 자아의 죽음의 삶을 살 수가 없다. 구원받은 성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직까지 부활의 새 몸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는 그러한 실패의 삶 속에서 사도바울과 같은 고통의 탄식을 하게 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렇게 자신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조금씩 놓아갈 때, 그 안에 들어와 계신 예수가 그 옛사람의 자리를 조금씩 차지하고 채우시는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실패만 했는데, 결국 그 공로가 우리에게 돌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성도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완성이 된다. 그러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성도가 겪어야 하는 자기 부인의 삶이 금식의 삶으로 아름답게 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처음 자리가 뭔지도 모른 채, 스스로 경건생활과 종교행위를 함으로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때 주님께서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다’고 말씀을 하신 것이다.
새 포도주, 새 옷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게 되는 은혜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말한다. 신약 시대는 예수님의 은혜로 창조가 되고 은혜에 의해 경륜이 되어야 한다. 그 새 포도주와 새 옷은 절대 헌 옷과 헌 부대(구약)와 조화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새것은 헌 것을 파괴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시자 돌로 지어진 옛 성전이 파괴가 되고, 제사와 절기와 율법이 폐기가 된 것처럼 새것은 옛것과 절대 공존할 수 없다. 생베는 헌 옷을 찢어버리고, 새 포도주는 헌 부대를 터뜨려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도 자꾸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고, 자신의 공로를 앞세워 잘난 척을 하고 있다. 선한 행실과 도에 지나는 헌신으로 개인과 교회의 명성을 높이고자 한다. 그 어디에도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이 없고 사람과 교회의 이름만 드높이 날린다. 다른 사람, 다른 교회 생각할 필요 없다.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면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까?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울타리 속에 감추어 둔 자기 자식, 자기 가족, 자기 재산, 자기 인기, 자기 명성, 자기 건강을 위해서 아닐까? 그게 구약이다. 헌 옷이요, 헌 부대란 말이다.
그런데 은혜의 복음이 구약이라는 헌 옷에 붙어 있고, 구약이라는 헌 부대에 들어가 있는 꼴이다.
분명 우리 인생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을 알게 하는,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의 떡이 더 좋고, 그 떡을 얻어내기 위해 나의 종교 행위와 나의 착한 행실을 보태고 있는 것 아닐까?
왜 교회 일에 열심을 낼까? 천국 가야 하니깐? 그건 예수님의 공로로 이미 성취되어 있다.
우리는 천국 가기 위해 선한 행위를 하고, 천국 가기 위해 종교행위를 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흙에 불과한 우리를 하늘나라 백성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열심히 배우고 깊이 감격하자는 것이다.
새 술, 새 옷은 그러한 구약 적 열심과 구약 적 축복 개념과 절대 섞일 수가 없다.
그런데 주님께서 ‘너희가 금식을 해야 할 날이 온다’고 말씀을 하신다. 그때는 신랑을 빼앗겼을 때라는 것이다.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날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날, 그들은 금식을 하며,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다, 라는 처음 자리의 고백을 해야 했다. 그게 ‘너희가 나를 빼앗길 때에 금식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 십자가의 죽음에 내가 함께 동참하는 자로 서야 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금식이 되셔서 죽으신 그 현장에서 우리가 우리를 십자가에 매닮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처음 자리, 죽은 흙의 자리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 행위를 꾸짖고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예수를 빼앗긴 날에 금식은커녕 잔치를 벌인 것이다. 그게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정치 않는 세상의 죄악상이다. 나의 가능성과 나의 노력과 나의 열심을 인정해 주지 않는 자가 죽었으니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 39절에서 ‘너희들은 묵은 포도주를 좋아한다.’고 확정 지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묵은 포도주는 율법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시적 힘으로 주어지는 세상 적 축복을 말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묵은 포도주, 구약을 좋아한다. 율법을 지켜 자기 의도 챙기고, 그로 말미암아 세상 힘도 챙기는 구약, 매력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새 포도주를 좋아하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새 포도주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과 힘을 다 부수며 들어오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은혜의 새 포도주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가 약속하는 것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영적 축복 다. 이 그러니까 은혜의 새 포도주는 사람들에게 홀대를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도 자꾸 자신들의 선한 행위로, 자기의 평판이, 인기를 챙기려 하고, 세상의 힘을 얻어서 자랑스러운 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때 새 옷과 새 포도주가 그 헌 옷과 헌 부대를 찢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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