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2: 헌신보다 중요한 긍휼 - 마태복음 9장 9~13절

차작가 2023. 11. 2. 10:48

9절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 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심으로 시작한다.

•세리­: 세리는 로마의 압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유대인을 희생시켜서 치부하는 착취자로 생각했다. 국가의 명예를 팔면서 살아가는 배신자로 멸시받는 존재였다. 그리고 사회의 가장 비열한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마태­:마태는 헬라식 이름이고 히브리식 이름으로는 레위라 불린다.(막 2:14; 누가복음 5:27,29), 그래서 레위 마태라고도 한다. 그는 평소에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이 열려 있었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었으나, 예수께서 자기를 주목해 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왜냐하면 랍비들로부터 심한 멸시를 받는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심­어느 날 세관에 앉아 있을 때 예수께서 지나가시다 ‘나를 좇으라’고 하심 : 매우 놀랐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았다. 마태의 마음에는 주저함이나 의심도 없었고 이익이 남는 사업이 가난과 곤란으로 바뀌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예수와 함께 있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의 사업에서 그분과 연합할 수가 있다는 것으로 그는 족하였다. 마태는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바돌로매) 다음 다섯 번째로 부르심을 받았다.

•번영의 때에 부르심­부자였던 마태나 가난했던 안드레나 베드로에게 똑같은 시험이 온 것이다. 번영의 순간에 그것을 포기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것이다. “이와 같이 각 사람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그리스도와 친분을 맺고자 하는 욕망 중에 어느 쪽이 더 강한지에 대해 시험을 받고 있다"

원칙은 항상 가혹하다. 하나님의 사업에 전심을 다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기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분의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 전적으로 바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으며 예수의 동역자가 되기는 더더욱 어렵다. 사람들이 위대한 구원을 인식할 때에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나타난 자아 희생은 그들의 생애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어느 길로 인도하시든지 즐겨 따라갈 것이다.

•엇갈린 반응들­바리새인들은 모든 백성들이 경멸하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를 여론 몰이로 배척하려고 하였고, 세리들 사회에서는 그 사건에 대한 깊은 관심이 고조되었다.

2. 마태가 베푼 잔치(10절)

•마태의 기쁨과 잔치­이전의 친구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풂. 자신의 기쁨의 표시일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에게도 예수를 소개하고 싶었다. 세리들만 초청된 것이 아니고 소외받고 천대받는 계층의 사람들 포함했다.

•예수께서 잔치에 기꺼이 참석하심­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예수님의 평판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을 아셨지만 그러한 정치적 문제가 예수님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없었다. 예수님께 외형적인 것은 별 가치가 없었다.

•랍비들과 바리새인들의 비난­[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 그들이 이렇게 따지고 드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양반과 상것의 구별이 엄격했던 것처럼 고대 유대인들도 종교적으로 경건한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들이 세리나 죄인들과 밥상머리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은, 요즘 식으로 말해서 경건한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들을 멀리 하겠다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바리새인보다는 비천히 여기는 세리를 칭찬했다. 그가 최초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힌 사람은 다섯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전력이 있으면서도 여전히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던 사마리아 여인이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으로 용서한 사람은 영적 성장의 기회라고는 전혀 없던 강도였다.

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12,13)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로 말씀하셨다.

첫째,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고 병자에게 필요하다.

둘째,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긍휼(자선)이다.

셋째,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 세 가지 말씀 중에서 결론은 세 번째인 “죄인을 부르러 왔다.”이다.

예수님의 이 대답이 흥미롭다. 예수님은 왜 세리,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세리와 죄인들을 무조건 변호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거나, 그들이 그렇게 부도덕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적인 이유를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으셨다.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나쁘냐 하는 방식으로 논란을 벌이기 시작하면 끝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논란에 빠져들지 않고, 아예 그것을 뛰어넘으셨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좀 속된 표현으로 허파가 되짚어졌을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와 근거를 예수님이 해체해버렸으니까. 그들의 목표는 의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직 그것 하나만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바리새인들은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초개처럼 버리고 의인이 되는 것에만 몰입했다. 구약성서의 성문화된 토라만이 아니라 그것을 강화하는 시행세칙들도 철저하게 지켰다. 예컨대 안식일에는 불을 지피지 않았으며, 대략 5백 미터 이상 걷지도 않았다. 돼지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았고,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다. 그들은 의인의 삶을 유지하려고 죄인들을 멀리 했다.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이 당연히 이런 의인들을 구원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의인이 아니라 이들이 상종하지 않으려 했던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일종의 폭탄선언이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아주 당혹스럽게 들린다.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과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저를 비롯해서 우리는 모두 그렇게 큰 죄인이 아니라고 여긴다. 우리가 그렇게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사람은 아니라고 여긴다.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가능한 대로 성실하게 살아보려고 나름으로 노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리새인 수준의 의인은 못된다 하더라도 큰 죄인은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서 당신들과 같은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딜레마이다.

이런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죄인이라는 말을 관념적인 차원으로 받아들인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같은 흑인 영가를 은혜롭게 부르면서 감격스럽게 눈물을 흘린다. 그래야만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죄인은 그걸 말하는 게 아니다. 아주 실제적인 죄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혐오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살인범, 인신매매범, AIDS 환자, 동성애자 등)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와는 반대로 가능한 한 교양이 있고, 세련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기를 원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에게는 상반되는 두 가지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죄인이라는 의식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인이라는 의식이다. 추상적으로는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실제적으로는 의인이라고 생각한다. 전자는 세리의 정체성이고, 후자는 바리새인의 정체성이다. 이런 이중적 자기 인식으로 인해서 기독교인의 삶은 일종의 허위의식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다. 이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강한 삶이 결코 아니다.

오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을 잘 보면, 예수님은 죄인으로 사는 게 좋다고 말씀한 게 아니라 그들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세리와 죄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신 것도 아니다. 만약 모두 세리와 죄인이 된다면 그 사회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바리새인처럼 모범적으로 살 수만 있다면 썩 괜찮을 사회가 될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세리보다는 바리새인들이 개인이나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사람들이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의 모범적인 삶이 아니라 그들의 의식, 그의 생각이다. 지금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신앙적 인식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기 의(義), 또는 업적 의이다. 자신이 이룬 업적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를 획득하겠다는 생각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생각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그런 의를 얻으려고 구도자적인 태도로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 경건한 삶의 성과를 얻었으며, 그런 업적을 통해서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아마 오늘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신앙도 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 유럽의 기독교는 모두 죽었다고 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꽤나 잘난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이 철저한 자기 의이다.

바리새인들의 자기 의가 왜 문제일까? 그들은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의인과 죄인을 구분한다. 예수님을 향한 바리새인들의 불평이 바로 그것이었다. 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느냐, 왜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주장과 논리를 근본적으로 뒤집었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이다. 인간의 중심을 정확하게 뚫어보는 놀라운 말씀이다.

죄인은 자기를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달리 바리새인들은 내세울 게 너무나 많았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기다리지 않게 된다. 겉으로는 그렇게 말할지 몰라도 중심으로는 자기가 이룬 업적에 매달릴 뿐이다.

헬라 문화의 공세 속에서 민족 정체성과 신앙을 지키려 했던 그들은 마치 오늘날의 복음주의 운동처럼 모범적인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 성경, 구별된 삶, 정치 참여 등을 강조했다. 그러나 선한 의도로 시작된 바리새 운동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방향으로 변질되어 갔다. 그들은 경건의 전문가가 되었고, 해박한 성경 지식으로 사람의 영혼을 자유케하기는 커녕 오히려 사람을 억눌렀다.

(왜 교회에서 훈련 받는가? 직분을 얻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영적으로 힘든 사람들을 돌보고 회복시키기 위해서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연약한 자들을 오히려 멀리했다. 마치 자신이 감염되는 것을 박기 위해 환자를 받지 않는 의사와 같았다)

바리새인은 선한 사람들이다. 성경을 연구하고 이를 삶에 적용하려 했던 그들의 훈련된 삶, 청지기 정신, 선교 마인드는 지금도 귀감이 될 만하다. 세속 문화의 위협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들의 동기는 순수했다. 그들은 우리의 이웃, 직장 동료, 정직한 시민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불편하게 했다. 바른 교리를 가지고도 하나님께 무관심하고 사람들에게 무자비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잘못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 주기 보다는 지적하는 데만 열심이었다. 마치 의사가 암을 발견하고는 치료는 안 하고 왜 이렇게될때 까지 관리를 안 했느냐고 꾸짖는 의사와 같았다. 거듭난 삶이 아니라 종교인으로 살았기에 예수님과 부딪혔던 것이다. 자기 의와 타인에 대한 무시가 바리새인의 특징이었다.

적용:

현대 교회에도 바리새인, 바리새적 요소는 많다. 해박한 성경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 사사건건 교회 일에 트집 잡는 사람, 십일조·주일성수 등을 완벽하게 지키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은 없는 사람, 교회를 자기 입맛대로 끌고 가려는 사람, 자신의 성경 해석이 진리라고 우기는 사람 등등. 종교가 모조품이 되어 버린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 주의다. 이런 바리새 주의를 향해서 주님은 13절에서처럼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사랑 없이 드리는 헌신 보다는 남을 특히 죄인들을 사랑하는 긍휼한 마음을 갖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도대체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일까? 이 세상에서 내세울 게 없는, 이 세상에서 실패한, 그래서 우리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오히려 의인이 아닐까? 반대로 하나님 앞에서 점수를 많이 땄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죄인이 아닐까?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긍휼한 마음 보다는 자기의 와 헌신만을 내세우는 현대 기독교인들을 향한 준엄한 경고이다.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다. 우리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전혀 다를 수 있으니까. 우리 주위엔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삶 가운데로 가셔서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삶으로 증거하시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