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4: 안식일에 대한 바른 가르침 - 마태복음 12장 1-8절

차작가 2023. 11. 2. 10:57

1절 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으니

2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절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전 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절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8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도입:

신앙생활 하는데 미신적인 요소가 있다. 특히 주일성수 문제에 있어서 더 그렇다. 주일날 예배에 빠지면 왠지 하나님 앞에서 잘못 한것 같고 사업이 잘 안되거나 안 좋은 일들이 일어 날 것 같다. 차가 가다 설 것 같기도 하다.. 주일은 구약의 안식일과 같은가?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은데 요즘 현대에는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바로 이 말씀에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떠올려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애 사역 동안 계속해서 비판하던 한 부류가 있었다. 바리새인이라는 부류이다. 이들은 사실 하나님의 율법을 아주 잘 지키던 자들이다. 사회적으로 보더라도 그들은 배운 것도 좀 있고, 공신력도 있고, 존경받던 사람들이었다. 기도하는 것만 보더라도 유창히 기도도 잘하고, 금식도 일주일에 몇 끼씩은 꼭 지키고, 절기 때마다 분명히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할 줄 알고, 가난한 자를 구제할 때는 꼭 빠지지 않고 나팔을 울리면서 구제하던 자들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는 것 같은 이들은 계속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꼬투리를 잡았다. 당신은 왜 우리처럼 그렇게 살지 못하냐고 비판을 했다. 금식해야 할 때 금식도 하지 않고, 안식일인데 밀밭에서 밀을 까먹고, 죄인인 세리들, 창기들과 어울리냐고 비판했다. 이들이 예수님을 비판하는 근거는 율법이다. 출신도 변변치 못한 나사렛 촌놈이 사람들 끌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바리새인들을 보고 예수님은 세리보다 못한 자, 외식하는 자, 독사의 자식,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호통을 치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던 율법의 삶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자유의 기쁨이 넘치는 천국의 삶, 복음의 삶이라고 계속해서 선포하셨다.

주님이 바리새인들과 싸우신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생활을 기계적이며 강제적으로 할 것을 가르쳤다. 내가 한 만큼 복을 받는다는 논리이다. 마치 모래 옮기기 노동을 하는 일꾼들처럼 내가 한 만큼 천국의 품삯을 받는다는 것이다.

해석과 결론: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신구약 중간 시대) 마카비 시대 때는 안식일에 적들이 쳐들어 오면 전쟁을 하지 않고 그냥 죽음을 당했다. 안식일을 깨고 전쟁을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안식일을 범하는 것 자체를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했다.

본문의 경우도 그렇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가장 많이 부딪힌 부분도 안식일에 괜한 부분이었다. 사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마음 먹은 것도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안식일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이었다. 세리나 죄인들과 밥 먹는 것도 못 마땅한데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갈등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1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을 때 마침 밀밭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날이 곧 안식일이었다. 제자들이 밀밭을 지날 때 마침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서 먹게 되었다. (손으로 비비고, 입으로 불어서, 알맹이를 씹어먹는 행위를 했다)

2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판하는 이유가 제자들이 남의 밭의 이삭을 먹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신 23: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이삭을 잘라 먹은 것, 즉 손으로 비비고, 입으로 불어서, 알맹이를 씹어먹는 행위 자체가 노동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출 20:8-11말씀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20: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 39가지 :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39가지 금지 사항을 갖고 있다(미쉬나, shabbat 7:2).

1) 바느질 2) (밭) 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단 묶는 일 5) 타작 6) 곡식 등을 까부는 일 7) 곡식이나 거두어들인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과 버릴 것을 고르는 일 8) 곡식 등을 가는 일 9) 체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그것을 빠는 일 14) 그것을 치는 일 15) 그것에 물들이는 일 16) 실을 잣는 일 17) (실 따위를) 엮는 일 18) 두 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19) 두 개의 실을 엮는 일 20) 두 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2) 푸는 일 23) 두 조각을 꿰매는 일 24) 두 조각을 꿰매기 위해 찢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일 28) 그것에 소금을 치는 일 29) 그 가죽을 가공하는 일 30) 그것을 반반하게 만드는 일 31) 그것을 자르는 일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불을 끄는 일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

이러한 금지 사항들을 공공연하게 어기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자로 여겼으며, 반대로 우상숭배자라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그 죄를 사함 받는다고 가르쳤다(탈무드, shabbat 118b). 이 밖에 더 자세한 규정들에 대해서는 미쉬나의"안식일"(shabbat) 부분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3-4절:

예수님은 거룩을 지키기 위해 금지사항들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역사적 사실을 거론한다. 그들의 위대한 왕인 다윗에 관한 이야기를 이야기 한다. 삼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간다. 그러고는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나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하니 21: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보통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여자를 가까이만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하는지라 21:5 …21: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진설병은 오직 제사장만 먹게 되어 있다. 레 24:5-9

레 24:5-9 , 24:5 너는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떡 열두 개를 굽되 각 덩이를 십분의 이 에바로 하여 24:6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24:7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각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24:8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24:9 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하나님은 다윗을 질책하지 않으셨다. 왜? 그는 부당하게 사울에게 쫓김을 당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프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규율보다는 자비를 더 우선시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만약 다윗이 정상적으로 대우를 받게 된 위치에서 이런 행동을 했다면 아마 질책하셨을 것이다.

5절: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는 것: 민 28:9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 두 마리와 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릴 것이니: 안식일에 숫 양 두 마리를 잡는 것은 일하는 것이므로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러나 죄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성전의 제사를 통해 백성들의 죄를 사하는 일) : 주일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노동은 제사장이 숫양을 죽이는 노동에 비하면 노동도 아니다.

이쯤에서 안식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언약 백성의 표징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뭘까? “너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가 하나님의 언약이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천국 생명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이 언약의 실체이다. 바로 안식일이 그 표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 이외의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망이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언약의 표징인 안식일을 범하면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엄명을 내려놓으신 것이다.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자들은 이렇게 죽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단지 그날, 토요일이 뭔가 범상치 않은 대단한 날이라서가 아니라 그 날이 갖고 있는, 그날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얻게 될 영생이요, 구원이기 때문에 그 날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의 설명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할례를 받지 않거나 안식일을 어기면, 그 언약의 표징을 행하지 않으면, 그 언약밖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해서 죽이는 것이다. 상징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완성될 진짜 참 안식, 영생의 표징이었던 것이다.

(골 2:16-17)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다. 그 실체는 (여기서 몸“소마”는 실체)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자들의 죽음을 상징한다.

이제 그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가 왔다. 그래서 오늘날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고 있다. 우리는 이 주일날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그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고 소망하며, 그 나라를 직접 누리기도 한다. 구약의 안식일이 갖고 있던 의식적인 면은 이제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 사라졌지만 그 정신과 의미는 그대로 오늘 날 주일에 배어있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이 그러했듯이 그 날을 무작정 지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 날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누리는 것이 정말 그 날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도 또 다른 율법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주일 날 왜 모여서 예배를 하는지 그리고 그 날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순히 “난 주일 지켰어” “난 교회 안 빼 먹었어” 라는 열심이 난무하고 있다.

우리가 정말 그 주일의 의미를 잘 알고 평소에도 그 안식을 잘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꼭 주일 날 예배드리지 않아도 된다. 그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날에 들어있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날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캘빈의 기독교 강요 2권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 계명의 의식적인 부분이 폐지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께서 오심으로 꼭 토요일 날 지켜야 했던 안식일의 의식적인 부분이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진리 이심으로 그가 나타나심으로 모든 그림자들이 뒤로 숨는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참 된 안식의 성취이시다. 그러므로 안식이란 어느 하루 동안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기까지 우리 삶의 전 과정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날짜를 지키는 미신적인 행위를 삼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일만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그 진정한 안식의 의미를 배우고 누리며 살아야 하는 자들이다.

그렇게 살다가 교회가 모이기로 한 어느 날에 함께 모여서 그 하나님을 자랑하고 찬양하고 , 그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즐기는 시간이 예배이다.

그런데 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것은 이렇게 진실을 이야기하면 몇몇 사람들이 “이제 마음 놓고 교회 빼먹어도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게 될까 봐서이다.

그래서 캘빈이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어떤 정해진 날을 택하여 성도가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비한 떡을 떼며 공적으로 기도하며 일군들을 노동에서 쉬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날을 정해 놓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모임을 가질 수 있겠는가? 혹자는 날을 구별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날마다 모이자고 한다. 그렇게 날마다 모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을 실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정한 시간을 영적인 지혜를 위해서 정하는 것은 진실로 가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요일로 그 날을 정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꼭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쉼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6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다윗은 그 일행에게만 배고픔을 만족시켜 주었고 성전의 제사는 그때 그때마다 죄를 용서해 주는 수단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성전 보다 크시다. 결국은 구약의 모든 법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라는 것이다.

7절: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안식일 준수의 가장 큰 의미는 자비이다. 제사(형식적인 의식)보다는 자비(죄 사함의 본질)를 원한다.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이 안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 이다.

마가복음 2:27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8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안식을 만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안식일 논쟁은 “예수가 누구신가?”를 답하는 기회로 사용된다. 예수는 다윗보다 크시고 참된 성전이시며, 안식일의 의도인 자비를 실현하시는 분이고, 더욱 놀라운 일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예수의 구속 사역이야말로 구약 안식일에 대한 원래 의도요, 안식일 율법의 참된 성취이자 완성인 것이다. 안식일 율법은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가 가져온 궁극적인 영원한 안식으로 성취된다. 즉 예수를 주님으로 만나 구원에 참여하여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안식일 율법의 성취이자 완성이다.

예수는 안식일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성취하고 완성하러 오셨다. 구원으로 성취되고 그 원래 의도했던 정신은 복음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예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똑같은 복음을 듣고 똑같이 구원받았다. 그런데 진정한 안식일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감동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바리새인과 그리스도인의 구분점이 된다. 우리는 바리새인일까 아니면 그리스도인 일까? 바라기는 모든 성도들이 복음에 감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