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50: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성도 - 요한복음 6장 30-37절

차작가 2023. 11. 12. 11:53

30절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절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절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절 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도입: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예로

이솝의 우화 중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야기가 있다. 어느 농부에게 거위가 한 마리 생겼다. 거위가 매일 알을 하나씩 낳는데, 신기하게도 황금으로 된 알이었다. 평소에 가난하게 살던 농부가 횡재를 한 것이다. 매일 황금 알을 챙기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젠 고된 농사일 하는 것도 싫어졌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분명히 거위 뱃속에 황금이 가득할 것이니 배를 가르면 크게 횡재할 게 틀림없어!” 그래서 배를 갈랐는데 황금은 보이지 않고 거위만 죽고 말았다. 농부는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우화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종착역은 멸망이라는 사실이다.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데, 지나친 욕망을 추구하다가 결국 망하고 마는 게 인간의 비극이다.

만족하지 못하고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들에게 본문은 그 해결책 제시하고 있다.

본론:

1. 본문의 배경

오병이어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계속 따라오는 상황이다.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하시니 그럼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일인가에 대한 답을 말씀하고 있다.

30 & 31절: 29절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했으니 당신을 메시아로 믿고 싶은데 당신이 행하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31절에서 만나의 사건을 언급하신다.

그들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무려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었다. 그 만나는 모세를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서 먹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유대교적 메시에 관에 사로 잡혀 있다. 메시아가 오면 만나의 기적이 한 번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일어 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했음에도 더 많은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다.

어제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 아니라 이 땅의 어떤 소년에게서 가져 온 떡이었다. 만나처럼 신령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의 기적은 단지 약 2만 명 정도에게만 먹였다. 모세는 거의 250만에 가까운 사람을 먹였다. 즉 당신은 모세보다 낫냐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의 기적을 계속해서 일으킬 수 있느냐? 고 질문하는 것이다.

그들에겐 여전히 충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세 가지 조건 1)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한 빵 2) 이스라엘 전체를 먹이는 것 3) 계속 일어나는 것을 만족하면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믿겠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보고 나서 믿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와 정반대다. 진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으면 볼 것이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래서 믿음은 항상 보는 것보다 우선한다. (요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

2. 예수님의 답변 (32절)

1) 먼저 그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모세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하심을 말씀하셨다. 인간은 참된 양식을 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고 분명히 얘기 하신다.

그리고 조상들에게 준 만나와는 달리 이제는 참 떡을 주실 것이다.

*물질적인 빵은 잠시 우리를 만족시키지만 영원히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2*인간은 절대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불만이다. 그래서 쉼이 없다. 그래서 항상 공허하다.

3*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욕망을 채우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끝없이 수고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을 해도 인간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또 다시 욕망을 위해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인간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참된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물질적인 실제적인 빵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실제 빵은 먹으면 사라지고 또 다시 배고프고 다시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빵은 영적인 양식으로 인간의 공허함, 외로움, 끊임없는 욕심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것이다.

2) 33절에 바로 그 하나님의 빵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떡은 하늘에서 내려(이 땅에서 태어나지 않고) 세상에(이스라엘 민족만 아니라) 생명을 줄 것이다. (만나를 먹었던 사람들은 다 죽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떡은 생명을 준다는 것이다.

*참된 양식의 근원은 하나님이 자신이다. 그런데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양식으로 내려 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진짜 영의 양식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 양식의 목적이 바로 생명을 준다. 밥을 먹으면 배부르지만 잠시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배부르게 하신다. 밥을 먹으면 힘이 난다. 그러나 잠시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힘을 주신다. 죄로 인해 생명이신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육적으로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영생 하도록 하셨다.

3.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34절)

1) 이 떡을 항상 주소서=> 만나처럼 매일 내려 주는 것을 원했다.

once for all 단 한 번으로 영원까지 만족하게 하소서 이런 뜻이다. 만나는 40년 동안 내리다가 끝났지만 저희들에게는 평생 그런 음식을 먹게 하옵소서. 그래서 먹을 것 걱정 않고 살게 하옵소서. 그러면 당신을 따르겠나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2) 영적인 것을 육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예수님을 찾은 무리들은 처음부터 관심이 배부름에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참 떡은 세상에 생명 주는 것임을 말씀하시자 그 떡을 자신들에게 달라는 요구를 한다. 과연 이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 떡을 달라고 한 그 의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분명 하나님이 주시는 떡이 생명을 준다는 것에 귀가 솔깃 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들이 생각하는 생명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영적인 생명을 마음에 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생명을 주는 떡에 관심을 두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육신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영적인 생명을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육신에 보탬이 되는 좋은 것을 본 것이다.

현대 교회의 믿음은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물과 떡을 구하는 수준과도 같다. 삶이 편안해질 수 있는 것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이 도와주신다면 육신이 편안해진다는 생각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다.

4. 사람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35절)

예수님 그들에게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밝히셨다.

5. 이 생명의 떡을 얻기 위해서는

첫째, 예수님께 나아와야 한다. 그러면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둘째,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 나올 수 있는 사람은 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즉 선택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께 올 수 있다. 선택 받은 그 자격으로 나올 수 있다. 그럼, 선택 받고도 우리가 예수님께 나올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라오디게아 교회 이야기이다.

라오디게아 교회 이야기(예수님께 나올 수 없는 사람-부유한 자는 올 수 없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0절 말씀은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쫓겨난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말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유했다.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해 나갈 이유가 없었다. 즉, 자기 배부름을 위해서 사는 인간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쫓겨나신 것이다.

바로 영적인 갈급함 없으면 예수님을 찾지 않는다.

그럼, 누가 예수님께 고개를 향할 수 있는가?

사마리아 여인을 예로 들어보자.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마셔도 목이 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여인의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시는 것일까? 예수님은 남편이 다섯이나 되고 지금 있는 남편은 남편이 아닌 여인의 실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수치스러운 실상을 모두 아시고 드러내신 예수님에게 여인은 '선지자'라고 고백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앞일을 예언하는 선지자로 인식을 한 것이다.

그리고 예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여인의 입에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말이 나오게 되고 예수님이 메시아며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신다. 그리고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는 말로써 예수님을 증거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에는 여인의 수치를 드러내신 예수님의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에 의해서 자신의 수치를 보게 된 여인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을 수치를 보지 못할 때는 예수님에게서 육신의 편한 것을 원한다. 그러나 자신의 수치를 본 후에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게 나온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수치를 해결하실 분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안다면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알게 된다.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실상을 바로 볼 때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간을 절망에서 건지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는 자들은 자신의 비참함을 보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없는 그것이 곧 절망임을 알 때 자연히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나오게 된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여기에 구원 받은 성도의 의무가 있다.

현대 교회는 십자가를 부지런히 말할 뿐 십자가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보지 않는다. 부요함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말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련한 것, 곤고한 것, 눈 먼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아니면 갈 수 없는 생명의 자리 또한 마음에서 멀어질 뿐이다.

믿음의 풍성함은 비참한 인간의 존재에서부터 출발한다. 예수님은 어둠에 있고 비참에 있는 인간에게만 빛이 되시고 희망이 되신다. 그러므로 자신이 비참을 보지 못한다면 빛이 되시고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희망을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란 성경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달라진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에 대해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를 신자라고 말할 수 없다. 신자란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아니면 자신의 운명이 어떠함을 알기에 예수님을 원하게 된 사람이 신자이다. 예수님에게서 하늘의 생명을 보기에 자연히 세상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멀어져 가는 것이 신자이다. 여기에 믿음의 풍성함이 있는다.

예수님으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음은 오직 예수님만을 원하는 믿음의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생명을 원하고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는 사람들이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수 있다.

결론:

생명은 죽음의 자리에서만 가치 있는 것이다. 죽음을 아는 자, 그가 바로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죽음과 인간의 비참함을 잊어버린 채 예수님에게 나온다면 결국 엉뚱한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갈급해 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면 희망이 없음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들에게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떡으로 오신 분이 되며 이런 성도들은 하나님의 떡이신 예수님 때문에 진정으로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축복을 우리는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