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내 안에 계신지 우리는 무엇으로 성령이 내 속에 거하심을 확인할 수 있을까?
<예화>
제2차 세게 대전 중에 프랑스의 한 고아원에서 일어난 일이다. '마라스무스'라고 하는 희귀하고 치명적인 질병이 고아원에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발병했다. 위생 상태도 양호해서 전염병이 돌만한 환경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주어도 놀지 않았고, 먹을 것을 주어도 잘 먹지 않았으며, 자꾸만 야위어가고 기운을 잃어 갔다. 그러다가 급기야 죽는 아이까지 생겼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국제기관에 속한 의사들이 고아원에 와서 그 아이들이 대체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곧 아이들의 증상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내려졌고 아이들은 빠른 시일 내에 회복될 수 있었다. 그 처방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스킨십이었다. 매시간 10분씩 아이들을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고, 입맞춤해 주고, 대화하면서 사랑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충분히 접촉해 주었을 때, 아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되기 시작했다. 다시 생기를 찾고, 우유도 먹고, 놀기 시작하더니 병도 완치됐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접촉이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
1. 본문 배경
1) 오늘 본문 5절에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라고 시작하고 있다.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했다. 예수님의 능력은 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고 기대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떠나버리신다면 제자들의 희망과 기대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이 희망 둘 곳이 없게 된다. 때문에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근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떠나시면 제자들은 세상에서 미움과 박해를 받을 것임을 예고하셨다. 또 16:2절에 보면 유대 사회에서 출교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대로라면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없는 세상은 어둠이며 절망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때 수많은 기적을 일으켜 주셨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분이 도맡아 해결해 주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근심을 한 것이다. 예수님이 떠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에게 끼칠 불이익을 먼저 생각했다. 그것은 사랑하는 예수님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오는 근심이 아니었다.
2)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성령이 오시지 않은 상태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제자들이 육신으로 계시는 예수님을 믿고 있다가 제자들을 떠난다고 하시자 마음에 근심이 되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는 믿음의 대상이 자기들에게서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불안과 염려이다. 이것이 인간의 수준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의심하면서 믿지를 않는다. 보이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을 돕기 위해 성령이 오셨다.
3) 책망하다의 뜻
그런데 그 성령이 오셔서 책망하신다고 했다. 오늘 본문 8절에 쓰인 ‘책망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엘렝코’를 번역한 말이다. 그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모두 17번 쓰인 단어이다. 그 단어는 때로는 ‘폭로하다’(눅3:19, 요 3:20, 엡5:11, 13)라는 뜻으로, 때로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다’(마 18:15, 딤전5:20, 딤후4:2, 딛1:9, 히 12:5, 계 3:9)라는 뜻으로, 때로는 ‘고소하다, 고발하다’(요 8:46, 16:8, 유 15)라는 뜻으로 쓰였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번째 ‘고소하다, 고발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4) 누구를 책망하나?
그렇다면 이렇게 ‘고소와 고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단어가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 말일까? 말 그대로 세상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세상이 제자들 안에도 여전히 오염이라는 잔재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고소는 1차적으로 세상을 향한 고소이지만 2차적으로는 제자들 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세상은 그러한 하나님의 고발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고발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은 성도들뿐이다. 그래서 그 성령님의 고발에 의해 찔림을 받는 사람들은 성도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책망에 의해 무언가를 깨닫고 그것을 회개로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들은 성도들 밖에 없다.
성도들은 자신들 안에 여전히 오염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는 그 세상을 향해 날아오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고소를 받으며, 자신들의 구원이 어디로부터 이루어진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근심을 덜어내게 된다. 그래서 성도에게 성령이 임하면 성도의 삶에 검과 불이 들이닥치게 되는 것이다.
2. 성령의 사역 (8-11절)
먼저 왜 꼭 ‘죄와 의와 심판’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 볼까? 그 셋은 심판이 일어나는 법정에서 죄와 무죄와 선고를 표현할 때 쓰이는 단어들이다. 따라서 그 셋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난 것을 말한다. 즉 죄 있다 하여 심판을 받은 이가 무죄한 자로 판명이 남으로 그를 죄 있다 한 이가 오히려 심판을 받게 되는 십자가 사건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 ‘죄와 의와 심판’이라는 단어들이 함의하고 있는 내용이다. 쉬운 말로 죄와 의와 심판은 십자가의 제목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1) 죄에 대하여 (9절)
세상은 죄를 규정하기를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적 위반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 9절(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오)에서 예수님은 ‘죄’를 규정하시기를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정의를 내려 주신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죄,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는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피조물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죄’다. 피조물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죄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그렇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삶을 정의하고 있는 것 자체가 죄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마태복음의 말씀대로 선인이든 악인이든 구분하지 않고 해를 비취고 비를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힘과 노력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것이 죄다.
예수만을 의지하지 않는 모든 삶, 여전히 자신의 가능성을 붙들고 있고, 예수 이외에도 행복의 길은 있다고 믿으며, 돈이나 명예나 자식이나 육신의 건강을 행복에 이르는 도구로 여기며 그것들을 추구하며 사는 모든 삶이 바로 죄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분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자신임을 아는 것이다. 즉 자신을 진노의 자식으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를 믿지 않은 죄를 책망한다는 것은 자신이 진노의 자식임을 외면하고 살았던 그것이 죄라는 것을 책망하신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성령으로부터 죄에 대해 책망을 받는 신자는 자신이 진노의 자식임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2) 의에 대하여 (10절)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
세상은 의를 인간의 착한 행동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를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다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이것이 왜 의가 되는 것일까?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틀리고 자기들이 옳다고 해서 예수님을 죽였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옳은 분은 예수님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예수님만이 옳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만이 의롭다.
천국은 의로운 자가 가는 나라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의가 없다. 예수님만 의롭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의로 여김 받고 천국에 가게 된다. 따라서 믿음이 있는 자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는다. 의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예수님의 행함만을 자랑하고 의지할 뿐이다. 이것이 의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깨달은 신자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의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고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기 때문에 어떤 자기 행위도 의로 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옳음’ 그 ‘의’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선물하셔서 그 ‘의’를 전가 받도록 하셨다. 성령이 우리 성도들에게 ‘의’에 대하여 가르치신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삶이 옳았다는 것을 가리킴과 동시에 ‘의’는 예수의 의를 의지하며 그 의의 전가를 믿는 믿음으로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그렇지 않고 자신들의 옳은 행실이나, 착한 행위, 선한 삶 등을 의로 내놓는 사람들은 모두 고소해 버리신다는 것이다. 그게 의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만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인데 거기에 자기의 의를 조금이라도 보태고 있는 자들은 다 불의한 자가 된다. 자기 ‘의’는 ‘열심’으로도 격발이 되는데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열심은 결국 하나님 나라에 해만 된다.
=> 행 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3) 심판에 대하여 (11절)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세상 임금은 세상 권세 잡은 자 즉 사탄을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다시 살리셔서 부활케 하심으로 사탄이 쥐고 있던 사망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셨다. 이것이 사탄이 심판을 받은 것이다. 사탄은 더 이상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사망의 권세를 내세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계속해서
"행 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예수님이 사망을 이겼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 믿는 우리도 사망을 이겼다.
죄, 의, 심판 모두 무엇을 기준으로 설명이 되고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설명이 되고 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잣대로 하여 그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고 믿는 이들은 무죄로, 의로운 자로, 사망을 면하는 자로 삼아 주시는 것이고,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을 믿으며,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 권세 잡은 자의 편에서 힘의 원리를 지향하는 이들은 죄인으로, 불의 한 자로, 심판 대 앞에서 심판을 받아 영원히 사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기준으로 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누구를 책망하실까? 바로 세상과 세상 속의 자기 백성을 책망하신다. 죄가 무엇이며 의가 무엇이고 심판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행 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예수를 믿지 않는 게 죄인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만이 옳은 의의 길인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린 분인지 몰랐습니다. 이젠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요?)
3.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
우리는 성령에 의해 책망을 받고 살아가고 있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에 대해 책망을 받고 있나? 예수님의 행함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함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책망을 받고 있나? 책망이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성령과 함께한 삶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우리 속에는 불의가 가득 차 있는데 성령이 내 안에 오신다면 불의에 대해 책망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양심의 고소를 당해야 하고, 성령에 의해 고발 당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들도 ‘내가 원래 이렇게 악한 자였나?’하는 자기 존재에 대한 자괴감에 흔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진심으로 성령이 함께한 신자는 자신의 불의함을 책망당하면서 날마다 의로우신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고자 힘쓰게 된다. 자신에게는 의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의의 행위만 자랑하고 높이게 된다.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으며 세상 것을 기준하여 사랑과 은혜를 평가했던 자신을 책망하게 된다. 자신을 책망하며 주님만 바라보는 그가 곧 성령이 함께한 신자이다.
성령은 바로 그것을 도우러 이 땅에 오셨다.
결론: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의 증거로 내려오신 성령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고소해, 참된 의가 무엇이며, 죄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떠한 자들이 심판의 대상이 되는지를 가르쳐 주고 계신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고소에 민감하게 반응해 열심히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진심으로 성령이 함께한 신자는 자신의 불의함을 책망하면서 날마다 의로우신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고자 힘쓰게 된다.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달으며 세상 것을 기준하여 사랑과 은혜를 평가했던 자신을 책망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책망하며 주님만 바라보는 그가 곧 성령이 함께한 성도이고 성령이 함께 하는 성도는 그래서 다르다.
우리가 여전히 죄 속에 살아가면서도 죄로 인한 심판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죄에 파묻혀 살아가는 진노의 자식을 위해 피 흘려 죽으시고 지금도 우리를 진리의 세계에 붙들어 놓기 위해 일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감사하게 되는 것이 성령이 활동하시는 증거이다.
성령의 왕성하신 활동으로 인해 우리는 매일 같이 책망을 받으면서 십자가의 의의 세계를 바라보는 성도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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