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47: 오직 예수만이 답이다 - 요한복음 5:1-9절

차작가 2023. 11. 12. 11:49

1절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절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 이러라)

5절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도입:

어떤 일을 진행할 때 우리의 생각에만 골몰하다가 낭패를 볼 때가 많다. 보통 내가 가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면 다른 의견을 잘 듣지 않으려고 한다. 성경에서는 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통해 자기의 생각을 버리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있다. "5: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 게 보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5: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5: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하니"

나아만 장군의 경우에는 인생의 멘토, 조언자의 말을 잘 들어 병을 고치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의 기준을 교회에 두고 있다. 교회를 기준으로 해서 어느 정도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느냐를 신앙의 척도로 삼는 경우가 많다. 또 교회에서도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신앙으로 강조하고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신 신앙 이외의 모든 것은 신앙이 아니다. 다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에서 표출되는 종교 행위일 뿐이다.

오늘 본문은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이니깐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본론:

우리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말씀만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 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웅덩이(못)에서 각종 병자들(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중풍병자)을 만난다.

양문이란 양이 들어오는 문이다. 양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쓰는 짐승이다. 즉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인 양을 끌고 올 때 양문을 통해서 양을 들여왔었다. 그래서 양문 가까이에는 성전이 있다. 이 양문 옆에 베데스다란 못이 있었다. 베데스다란 이름 역시 은혜의 집이란 뜻이다.

베데스다 못에는 행각이 다섯이 있었다. 그리고 이 행각에는 많은 병자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중풍병자)들이 누워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3절). 과연 이들이 기다린 것은 무엇일까?

그 이유가 3, 4절에 나온다.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 이러라’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그 베데스다 못 가에 모여 있는가 하면, 베데스다 연 못의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전설을 믿고 그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영적인 존재들이 어느 곳에서든지 있음을 믿었다. 이 연못의 물이 움직이는 것도 영적인 존재들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 웅덩이에 대한 설명이 많은 사본들에서는 빠져 있기 때문에(NIV에는 없음) 후기에 ‘물이 움직이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첨가된 것으로 본다.

이 부분을 두고 학자들은 그 베데스다 연못이 간헐천이었기 때문에 간혹 온천물이 올라오게 되면 그 물이 움직이게 되었고 광물질과 미네랄 등이 풍부한 온천물로 인하여 피부병이나 관절염 등을 앓는 환자들이 낫기도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 연못을 두고 그러한 전설이 생겨났다. 사실 미신이다. 이런 미신을 믿고 많은 병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웅덩이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많은 병자들이 이 웅덩이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거기에 모여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병이 들어 어느 것도 할 수 없고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한 사람에게 다가가신다. 그는 38년 동안 병들어 있던 사람이었다.

이 병자는 38년 동안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병이 들어있었다.

또한 이 병자는 도와줄 가족도 친척도 없었다. 한마디로 소외와 절망 가운데 있는 병자였다.

이 병자에게 예수님이 물으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사실 이 질문은 38년 된 병자에게는 하나 마나 한 질문이다. 이 사람은 38년 동안 병으로 인해서 고통받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슨 병인지는 언급이 안 되어 있지만 38년 동안 낫지를 못하고 고통을 받았다면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인 것은 확실하다. 예수님의 질문 의도는 병자의 대답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그 병자의 답변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 ‘네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7절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저 웅덩이에 들어가지 못해서 낫지를 못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답변을 한 것일까? 자기가 낫는 방법은 저 웅덩이에 맨 먼저 들어가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질문에 그렇게 답변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인간의 문제점을 볼 수 있다. (자신의 경험만 생각할 때는 해결책이 없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게 아니라 자기가 가진 생각으로 답변을 했다. 비록 미신적인 것이라도 자기가 나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 연못으로 먼저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질문에 평소 자기 생각을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낫는 게 필요하지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오직 그 물에만 신경 쓰이게 했을까? 그 연못이 눈에 보이는 치료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현혹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보이는 곳에 눈이 가게 되어있다. 그 물이 기적을 일으키고 눈에 가시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을 두었다.

하지만 본문에서처럼 자신을 못에 넣어주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 버린다는 원망을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을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다른 길, 즉 베데스다 못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38년 된 병자의 대답을 통해서 볼 수 있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진리와 생명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가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을 왜 믿지 않는 걸까? 자기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생각하고 경험한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확신하는 사람에겐 예수님이 진리요 길이라는 말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방법은 직접 보여 주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오직 생명의 길이라고 확신하고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너희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병 고침을 받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병을 직접 고치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진짜 진리요 생명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것이다.

오늘 본문 속의 베데스다 못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서든 그 연 못에 들어가 병을 고치고자 하는 병자와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다가 좌절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이 너무나 똑같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자신들의 행위나 노력을 의지하고 있는 무능력한 아담들에게 찾아가셔서 은혜로 거저 그들을 구원해 주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은혜의 집, 베데스다에 진정한 참 안식을 은혜로 가져다주실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베데스다 연 못만을 바라봤다. 즉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뚫어지게 연 못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병자의 요청대로 웅덩이로 데려가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방법은 단지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씀이었다.

38년 된 병자는 자신이 나을 수 있는 길을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는 것으로 믿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못에 넣어주셔서 낫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고쳐주셨다. 그 병자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도와주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있는 방식으로 도와달라고 예수님에게 기도한다. 이것이 곧 베데스다 못의 병자가 예수님에게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못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결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신앙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병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이것은 단지 병이 나은 기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베데스다 못에 모여 있던 수많은 병자들에게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믿었던 베데스다 못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사건이었다.

못에 들어가야 산다고 믿었던 사람들 앞에서 말씀으로 38년 된 병자를 나아서 걸어가게 하셨다. 이것은 곧 인간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는 것이지 베데스다 못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좋은 직장, 좋은 대학, 돈 등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참된 삶이다.

결론:

신앙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오는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것처럼 신앙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삶의 방식으로 여기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것만이 사는 길임을 믿고 그리스도에게 모든 소망을 두려고 힘쓰는 그가 바로 신앙으로 살아가는 신자이다. 38년 된 병자의 대답이 곧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왜 그 많은 병자들 중에서 굳이 38년 병자를 대표로 고치셨을까? 그것은 오래된 세월 동안 진리보다는 허망한 것에 에너지를 쏟고 사는 사람들에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세상의 풍조나 허망한 것에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 38년 병자처럼 헛되고 신기루와 같은 것들에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방식을 도와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만 의지하라고 말씀하신다. 베데스다 못에 해결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베데스다 못에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