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49: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인가? - 요한복음 14장15-21절

차작가 2023. 11. 12. 11:52

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절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절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본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일까?

‘마 22:37-39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둘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계명을 제대로 지키실 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노력은 하지만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한다. 그럼, 예수님은 왜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만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을까? 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을까? 계명을 완전히 지키는 사람은 없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명을 지키는 것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계명을 주신 이유를 이해하면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계명 즉 율법을 주신 때를 살펴보자! 십계명(출 20장)의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한 율법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 13:9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그것은 유월절이다.

유월절이 무엇일까? 정결한 것의 죽음을 대신 받고 넘어간 것이 유월절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어떤 속성을 지닌 나라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어린 양의 피로 인해서 발생한 나라이기 때문에 피를 믿음으로 존재하는 나라임을 보여준다.

유월절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백성 됨과 백성 아님이 구별된다. 그러나 유월절은 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의식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물론 유월절에 드리는 의식의 방법까지 하나님 편에서 제시하셨지만 그것은 의식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월절의 정신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기 위해서이다.

유월절은 정월 14일 해질 때부터 시작한다(출 12:6,18). 그러나 민수기 9:11절에서는 유월절이 한번 더 추가된다. 그 이유는 사람의 시체로 부정케 된 사람이나 먼 여행 중이어서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배려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유월절은 특정한 날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의식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며 오직 이스라엘로 하여금 유월절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죽음이 우리를 넘어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유월절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결국 희생의 의미를 아는 자만이 참된 이스라엘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결국 처음의 율법은 문자가 아니라 유월절 정신이었음이 드러난다. 죄인을 위해서 희생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이스라엘의 율법이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음을 잊으면 안된다. 이것이 그들이 지켜야 할 율례이고 율법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유월절 후 애굽이란 옛 세상과 결별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가기 위해 홍해를 건너는데 홍해를 건넌 것은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향력 안에 들어왔다는 뜻이 된다. 하나님의 생명의 영향력 안에 산다면 그들은 자신의 생존에 대해서는 초월을 해야 했다. (16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는 불만을 토로)

출 16:4절에 보면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 하나 내가 시험하리라"라고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것을 시험하겠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또 다른 시험을 하시는데 그것은 칠일에 안식하는 것에 관해서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는 율법은 무엇인가? 유월절 정신이다. 즉 날마다 비같이 주어지는 양식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희생이 우리를 살린다는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시험칠일 때는 거두지 말라는 것이다.

23절에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이 칠일 째에 만나를 거두던 것을 중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영향력 안에 있음을 알고 생존의 문제를 초월했을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희생 곧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것임을 알 때 생존의 문제를 초월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원래 존재했던 모습이다. 하나님이 생존을 책임지신다는 걸 알 때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안식의 뜻이다. 이렇게 볼 때 과연 안식일은 요일이 의미가 있을까? 안식일은 어떤 상태로 존재하느냐를 묻는 것이지 어떤 날을 잘 지키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이라는 것은 문자화 된 법 하나하나에 순종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속에 흘러오고 있는 정신, 즉 하나님의 희생을 이스라엘이 잘 기억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시내산에서 주어지는 율법과 계명도 이런 흐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율법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창세기 3장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지상에 반영되는 점차적인 과정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뿐이다. 때문에 율법이 의미하고 있는 정신은 약속의 시작부터 이미 내포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희생을 이스라엘이 기억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애굽과 차별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라는 것은 애굽과 차별된 나라, 즉 하나님의 희생이 반영된 나라로서 존재하라는 의미다. 결코 율법을 인간의 의와 노력으로 극복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희생이 반영된 이스라엘은 필히 희생의 정신, 즉 자비가 보여야 한다.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희생 때문에 살아가는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강자와 약자의 힘의 원리로 존재하는 애굽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이란 공동체는 하나님의 희생의 원리로 지탱되어야 한다. 이 구원의 은혜를 십계명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비가 보여 져야 한다.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 희생정신이 있는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게 되어있다. 20:13 살인하지 말라 => 희생정신으론 살인 못한다. 20:14 간음하지 말라 => 평소에 배우자에 대해 자비하고 희생하는 사람은 절대 간음하지 못한다. 20:15 도둑질하지 말라 => 20: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따라서 율법과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구원의 은혜 안에서 희생의 원리로만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계명의 항목 하나하나를 실천하라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미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도 자질도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거룩한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고 기대한다는 것은 모순만 드러낼 뿐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해 주시는지는 두 돌판에서 볼 수 있다. 처음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두 돌판은 백성들의 우상숭배로 인해서 깨어진다.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은 모세에게 직접 제조하도록 명령하신다(신 10:1). 그리고 돌판과 함께 언약궤를 만들라고 하신다.

두 번째 돌판을 모세에게 제조토록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에게 율법을 지킬 자질이 없는 이상 하나님이 다시 돌판을 만들어서 주신다고 해도 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세에게 돌판을 만들라고 하시고 그 돌판을 언약궤에 넣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극복하지 못한 죄의 책임을 땅에서 누군가가 해결하는 방식으로 은혜를 지속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신다. 그 해결 방식이 희생이다. => 언약궤 위에 속죄소를 만들어 제물로 희생된 동물의 피를 뿌림으로 백성들의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돌판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을 보여준다. 따라서 율법의 완성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된다.

따라서 성도가 자기의 죄인 됨을 알고 그리스도의 희생만 의지하고 산다면 그것이 곧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실천하는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지 말씀에 대한 동적인 실천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어 가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율법은 살아있지 않으며 율법을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 예수님 홀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고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의 희생을 드러내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마감된 율법을 다시 끄집어 내어서 윤리적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며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의를 바라보는 믿음의 모습이 아니며 인간의 행위에 의미를 두는 비 복음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믿음의 성도는 계명을 조목조목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는 사람이다. 이것이 신자의 행함이 되어야 한다.

종교적 인간은 자기 행함으로 믿음에 접근하고자 하고 믿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의식과 지킴 등을 통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것은 십자가의 은혜에 전혀 눈을 두고 있지 않고 있는 결과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는 ‘하라’는 명령 때문에 실천하지 않는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안에 있고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

예수님의 계명은 온 맘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사랑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 마음은 사랑하는 자로 살고 싶어 하지만 우리 안에 다른 무엇인가가 그런 마음을 막고 훼방하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곤 한다.

성도라면 세상보다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또 그렇게 살고자 원하는 것이 성도다운 생각이다.

이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웃을 미워하며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말씀대로 희생하며 섬기며 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마음먹은 대로 안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나약함은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은 고아와 같이 나약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본문 18절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에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것이 인간이기에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신다.

그래서 보내시는 것이 성령님이시다.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자신의 악함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힘과 의를 포기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더욱 감사하게 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시키시고 그 사랑을 이해하는 만큼 성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성도는 성령이 오심으로서 세상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우리 스스로는 절대 계명을 지킬 수 없다. 하나님도 이것을 아신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율법의 희생정신을 바로 알고 성령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안에 거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노력해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리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 진정으로 예수님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