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 46:보지 않고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 요한복음 4:46-54

차작가 2023. 11. 12. 11:47

46절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절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절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절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54절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도입:

귀신 들린 사람을 축사하는 것을 본 경험이 있다. 교회 지체 중에 한 형제님이 귀신이 들렸고 축사를 하고 지속적으로 목사님께서 말씀 훈련으로 케어하시는 걸 지척에서 본 것은 나에게 큰 은혜였다. 하나님의 능력임을 체험하는 사건이었었다.

기적을 경험하고 싶은 것은 저 만의 희망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는 분들은 치료의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할 것이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은 채워줌의 기적을 소망할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부분에 기적들이 일어나길 바랄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런 기적들을 체험한다고 해서 과연 믿음이 생길까? 어느 미국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교회 어느 헌신적인 여자 성도님이 암에 걸려서 얼마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그 가족들은 소위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나오는 성도들이었다. 이 여성도님이 가족들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셔서 나를 고쳐주시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가족들이 믿고 열심히 교회 나오겠냐고? 가족들이 동의하고 목사님과 가족들이 열심히 기도했는데 진짜 기적이 일어나서 그 암이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가족들은 약속대로 주일 예배 나와서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두 달도 채 못되어서 가족들은 옛날의 패턴대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기적을 경험했어도 믿음은 자라지 않았다.

기적이 우리의 믿음을 확고히 하는데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출애굽기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홍해가 갈라지고 애굽 군대가 수장되는 기적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3일 만에 하나님께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다시 애굽의 종으로 돌아가는 게 났다고 불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생활하면서 무조건 기적을 배척하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기적처럼 건져주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그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성숙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에 기적으로 간섭을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우연이란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간섭하심 아래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러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성도의 삶 속에 일어난 기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은 절대 성도의 욕심을 따라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욕심을 따라 나타난 기적은 절대로 성도의 신앙 성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성도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에 쓰여 지지 않는다. 오히려 성도의 삶에 나타나야 하는 진짜 기적, 성도의 신앙 성숙에 필요한 진짜 기적은 세상 것들이 부족하고 없는 상태에서도 다른 이들처럼 절망하지 않고 그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며 찬양하는 기적이다. 다른 말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그 속에서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에 베푸시는 진짜 기적이다.

 

본문:

하나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은 바로 그러한 관점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사건이다. 그렇게 표적만을 보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했던 갈릴리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러한 표적들과는 관계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사건이 바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이다.

본문 46-4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리리 가나에 이르셨을 때 가나에서 34km, 25마일 정도 떨어진 가버나움에서 헤롯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왔다. 당시의 도로 사정을 감안할 때 25마일의 거리는 꽤 먼 거리였다. 보통 성인은 1시간에 3마일 정도 걷는다. 왕의 신하가 포장도 안 된 25마일의 길을 가는 데에는 적어도 8시간에서 9시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려오셔서 거의 죽게 된 자신의 아들의 병을 고쳐 주라는 왕의 신하에게 주님은 매몰찬 답변을 하신다.

"4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사실 오늘 본문을 여는 키는 이 구절에 들어 있다. 이것은 왕의 신하를 향해서만 하신 말씀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왕의 신하만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대의 사람들이 바로 믿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설사 표적과 기사를 봤다 하더라도 그들은 표적과 기사에만 매일뿐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주님을 그저 나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기적이나 일으켜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이 살아나는 표적을 통해 말씀하고 있다.

그 왕의 신하는 당시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헤롯 안티파스의 친척이거나 그와 아주 가까운 귀족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귀족이 종을 보내지 않고 자신이 직접 25마일을 걸어서 나사렛의 목수를 찾아갔다. 그러고는 그 미천한 목수에게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거기다가 그의 아들은 외아들이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그 아들이라는 단어 앞에 모두 관사가 붙어 있다. 그 말은 그 죽어 가는 아들이 외아들이었다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이라는 단어를 헬라어 ‘파이디온‘과 ‘파이스‘로 번갈아 쓰고 있다. 그 말은 그 아들이 어린아이가 아닌 자랄 만큼 자란 아이란 뜻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불원천리 25 마일을 걸어서 찾아온 사람에게 네 아들이 살았으니 그냥 가라고 하셨다. 그 신하는 주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셔서 자기 아들에게 안수를 하던 치료를 하던 무엇인가를 해 주시기를 바랐다. 그래서 계속 자기 아들이 죽기 전에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씀하셨다. 50절에 쓰인 ‘살았다‘’제‘라는 헬라어 동사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쓰인 동사이다. 그 말은 ’네가 돌아갈 때쯤 되면 그 아이는 이미 회복되어서 살아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아이가 지금 살아나서 네가 도착할 때쯤 되면 이미 오래전에 회복된 상태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믿기 어려운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 신하가 ‘그래도 표적을 보기 위해 왔으니 표적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않고 말씀을 믿고 자기 집으로 떠났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종들을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는 소식을 듣자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 즉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때(오후 1시)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그 신하하고 온 집이 예수를 믿게 된다.

결론:

성경은 이렇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표적만을 좇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와 함께 말씀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

표적을 보지 않고도 말씀을 믿고 말씀을 굳게 붙들고 간 신하는 자녀가 살아난 것을 경험하고 그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지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신하의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는 예수님이 '가라 살았다'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때였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능력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하는 비록 보지 못했지만 아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때 낫기 시작했다. 비록 눈으로 확인은 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다. 이것이 바로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세대를 향해 책망하시면서 능력의 말씀을 믿으라는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의 믿음은 'seeing is believing'‘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믿음인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believing is seeing''믿으면 보인다’의 믿음이어야 한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 그 신하는 보지 않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말씀을 의지하여 믿은 결과이다. 이 눈에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이 귀에 아무도 들리지 않아도 믿음만을 가지고 끝까지 걷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