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절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3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절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절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8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 하시매 갖다주었더니
9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절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절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도입: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물로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지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본문의 내용만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기적들이 초자연적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기능을 가지고 등장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기적의 사건을 대할 때 기적 자체에 매료되기보다는 기적의 사건 자체가 말해주고 있는 예수님의 계시에 관심에 기울어야 한다. 왜냐면 본문에서 요한은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을 표적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표적’ ‘세메이온’이라는 단어는 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장차 되어질 일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는 것이 표적이다. 그러므로 본문 역시 신비한 기적(miracle-dunamis)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되어질 일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주기 위한 기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을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11절에 보면 "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기적을 기적으로 말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말씀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모두 7개의 표적을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 표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사건이다. 그리고 두 번째 표적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표적이고 세 번째 표적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이고 네 번째 표적이 5병 2어의 사건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표적이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이고 여섯 번째 표적이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고치시는 사건이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표적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공부하면서 그 기적 자체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되고 그 기적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를 올바로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본문:
1절을 보면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거기에 있고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잔치에 청함을 받았다. 예수님의 모친도 있고 예수님도 청함을 받은 것은 잔칫집이 예수님의 친척 집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지만,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예수님의 친척 집인가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사실 여부에 관심 둘 필요가 없다.
어쨌든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지게 되고, 예수님의 모친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포도주가 없음을 말하게 된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혼인 잔치는 아주 특별한 기쁨의 잔치이다. 그리고 이 잔치는 하루 이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간 계속되는 잔치였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의 잔치에서 아주 중요한 포도주는 넉넉히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계속되는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다면 그 잔치는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잔치는 엉망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참으로 급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문헌에 의하면 포도주가 떨어진 것으로 인해 법적 소송도 당한 사례가 있음)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모친은 이 위기의 상황을 예수님이라면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많이 목격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진 위기의 상황도 예수님이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친에게 예수님은 우리가 듣기에는 참으로 매정한 말씀을 하신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것이 위기의 상황을 말하는 모친에게 하신 예수님의 답변이었다.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주님은 그렇게 이 세상 잔칫집의 포도주를 구하는 마리아의 요구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대답을 하셨다. 조금 엉뚱한 대답 같지만 그 대답 안에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내포되어 있다. 이 요한복음에는 주님께서 이러한 표적들을 행하신 후에 꼭 하시는 말씀이 있다.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내 때‘’호라 무‘는 요한복음 내에서 만도 여러 번 나오는데 그 ’때‘가 가리키는 것이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었다.
예수님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세상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 포도주가 없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즉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린 양이 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은 십자가 사건에서 분명하게 계시된다. 이때를 '내 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 때문에 오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 그리스도가 보여주시는 표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믿으면 너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라는 표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때가 성취됨으로 인해서 성령이 오시고 그로 말미암아 죄악으로 더러워진 우리가 깨끗함을 입게 된다'라는 표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참된 관계에 있는 성도라고 말할 수 있다.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로 포도주를 만든 것
예수님께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신 직후 하인들에게 비어있는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하신다.
그 여섯 개의 돌 항아리는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을 행할 때 쓰는 돌 항아리였다. 마가복음 7:3절의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라는 말씀대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기 위한 규례 때문에 준비된 항아리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것은 율법도 아니었고 그냥 장로들의 유전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돌 항아리가 비어 있었다. 장로들의 유전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유대인들이라면 그 항아리는 항상 맑을 물로 가득 차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항아리들이 모두 비어 있었다. 그 비어있는 돌 항아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지어지지 않는 ‘형식주의에 빠져 버린 생명력 없는 유대교’를 상징하는 것이다. 물도 채워져 있지 않은 정결 예식 항아리는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열광적인 종교 행위에만 빠져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님은 그 항아리들에다가 물을 가득 채우셨다. 그리고 참 기쁨과 참 행복은 어떻게 해서 오게 되는 것인가를 표적으로 보여주셨다. 그 물들이 모두 포도주가 되어 버린 것이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주로 ‘기쁨, 잔치, 희락‘을 상징한다.
(시 104:15)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심지어 랍비들의 어록에는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라는 말까지 있다. 그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이었다. 성경은 지금 형식뿐인 유대교를 ‘참 기쁨을 상실한 잔칫집’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잔칫집이 참 기쁨을 회복한 잔칫집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뿌려져야 비로소 그 잔칫집이 참 잔칫집이 될 수 있음을 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의 진짜 의도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
그러면 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 행한 표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는데 어떠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는지를 알아보자.
먼저 ‘창조‘라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널리 알려지지도 않는 동네인 가나의 어느 잔칫집에 나타난 것이다.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본질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본질이 바뀌었다는 것은 곧 창조를 의미한다. 주님은 가나라는 작은 시골 마을의 잔칫집에 들어가셔서 엉망이 될 수 있었던 잔칫집에 창조의 행위를 보태심으로 그 잔칫집을 회복하셨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성령으로 내주하신다. 그 주님은 지금도 이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마치 저 유대의 시골 가나와 같은 우리 안에서 물로 제일 맛 좋은 포도주를 만들고 계신다. 전혀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변해 가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창조를 하고 계심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비하면 많이 변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변화된 우리들의 모습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두 번째로 나타난 영광은 ‘불가능한 곳에 쏟아지는 주님의 기쁨‘이다.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다. 주님은 우리 백성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 하신다. 타락한 인간은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처럼 참 기쁨을 얻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참된 하늘의 기쁨을 쏟아부어 주신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칠 흙같이 어두운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흥겨운 잔칫집으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 믿는 것이 정말 즐겁다면 지금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 우리 안에서 포도주가 충만하게 흘러넘치는 가나의 혼인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쁨은 그냥 있으나 없으나 한 그런 작은 기쁨이 아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새로 만들어진 포도주는 무려 180 갤론에 가까운 양이다. 본문에 따르면 항아리 하나에 두세 통이 들어간다고 했다. 한 통이 보통 10 에서 20갤런 이니까 120에서 180 갤론의 포도주가 그 집에 흘러넘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기쁨이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늘 부족하다. 늘 빠르게 시들어 버린다.
이 세상의 기쁨은 절대적인 기쁨이 없다. 전부 상대적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충만히 채워지고 흘러넘치는 기쁨이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 삶 속에서 ‘희락’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여호와로만 기뻐하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의미이다. 자기가 원하는 상황이 주어져서 혹은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짐으로 기뻐하는 자가 아닌 오직 여호와만으로 기뻐하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성도의 힘이 되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이 땅을 잘 살아내는 무기가 된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 삶의 관심을 바꾸면 된다.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무엇이든지 그분이 하라는 대로 하라‘이다. 포도주에서 눈을 돌려 그분께 주목하게 되는 그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까지도 이 세상의 포도주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늘 부족하고 우울하고 초조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주님께서 ’너의 잔칫집을 엎어 버려라‘하시면 엎어 버려야 한다. 주님께서 ’네가 좋아하는, 너의 입맛에 맞는 포도주가 아닌 나의 피를 마셔라‘라고 말씀하시면 이 세상의 포도주를 즉시 포기하고 주님의 피를 마셔야 하는 것이다.’그 상황이 너에게 최선의 상황이다’하시면 그냥 우리의 상황 속에서 만족해야 한다. 그때 우리에게 참 기쁨이 회복이 되는 것이고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이 새록새록 자라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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