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요즘 시대에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8-10절에서 보면 사랑하며 살라고 말한다.
엄청나게 많은 계명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모든 계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하라’는 것으로 축약할 수 있다. 그래서 10절에서 처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완성이라는 원어는 ‘플레로마’로 충만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을 사랑은 율법의 충만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사랑만이 율법의 요구를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럼, 율법의 요구란 무엇인가?
첫째는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다. 9절처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런 십계명이 요구하는 도덕적인 가치는 오직 사랑으로만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아내와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간음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살인도 못한다.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하지도 않는다. 사랑이란 남을 품어주고 남의 유익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충만하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십계명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율법의 두 번째 요구 조건은 죄를 지으면 죽어야 하는 것이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런데 사람이 죽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짐승이 대신해 죽었다. 그런데 항상 죄를 지으니까 매번 제사를 드려야 했다. 이러한 불완전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 사항인 죽음을 만족시키고(율법의 요구를 들어주시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생명을 살리 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만이 율법의 요구를 만족 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겉으로 보기엔 모든 것이 있는데 공허해 보이는 이유는? 심령 가운데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비만의 원인 중의 하나가 사랑의 결핍증 때문(잘 먹어서도 있지만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은 공간을 음식으로 채우기 때문) 이다.
사람은 사랑 받을 때 생기가 넘치고 자신감이 생긴다. (식물과 동물들도 사람의 사랑에 반응) 반면에 사랑이 없으면 항상 부족감을 느낀다.
사도 바울=> 고전 13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만큼 사랑이 중요하다.
어거스틴은 ‘하나님만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나머지는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난 다음에는 마음대로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부모를 사랑하면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앞에 헌신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핵심은 ‘사랑’이다.
그럼, 어떻게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법을 살펴보자
8절 말씀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의 핵심은 ‘빚을 지지 말라’가 아니라 ‘사랑의 빚은 지면서 살아라’는 뜻이다. 빚은 갚아야 한다.
성도란 사랑을 갚아야 할 자로 부름을 받았다. 사랑하는 자로 살아갈 책임을 진자이지 사랑받아야 할 자로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성도 된 자는 교회에서 '누가 나를 사랑 안 해준다'라는 것에 대해서 섭섭해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라는 사실이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안타까워해야지 이웃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섭섭해한다면 사랑의 빚을 진자라 말할 수 없다.
만약 누군가가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과연 내가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사랑을 준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빚을 받는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사랑을 받아낼 만큼 사랑을 했을까? 사랑을 한 적도 없으면서 사랑을 해주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억지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사랑을 받고자 하지만,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다. 사랑받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사랑받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 분이 있다. 그분이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 적이 없는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다. 그것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셨다.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 두 번째는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 사람. 나 혼자 살겠다는 사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이전에, 예수님의 사랑을 흠뻑 받은 사람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이다. 이것 때문에 세상에 나가서 시간과 돈과 인생을 들여서 예수를 증거하고 그 사랑을 전하는 것 아닌가?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놀랍도록 경험했다. 그래서 ‘내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데 이 정도에 넘어 질 수 있겠나’하는 마음으로 좌절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을 지탱하던 모든 감정은 바로 이 빚진 자의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롬 1:1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로마 시민권자로 볼 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라는 말을 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 대해서 빚을 졌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부름을 입은 것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자신이 구원받을 만 해서가 아니라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부름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자에게 빚을 졌다는 말을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은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주위 사람들과 교회 그리고 특히 하나님으로 부터 너무나 많은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며 ‘빚진 자 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앞에서 사랑에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구약에는 수많은 계명이 있다. 그리고 그 계명들을 하나하나 지키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이렇게 많은 계명은 단 하나로 모아 버리셨다.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계명 안에 구약의 수많은 계명이 들어 있다. 그래서 8절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라고 말씀을 하는 것이다. 9-10절의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는 말씀에서도 역시 모든 계명은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이유는 계명을 잘 지키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아니다. 계명이 목적하는 것은 사랑을 아는 자 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에게만 있는 사랑을 아는 자 되게 하시기 위해서 계명을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계명이 주어진 배경은 그들이 애굽에서 인도함을 받고 나온 것에 있다. 그들이 애굽에서 살아나고, 홍해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양의 피에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로 이것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계명을 주셨다. 계명을 말씀하시기 전에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도 계명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것과 무관하지 않음을 계시하고 있다.
어린 양의 가치는 죽어 마땅한 자를 살리는 것에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죽어 마땅한 자로 보지 않는다면 그들이 아무리 유월절을 지킨들 그것은 단지 의식일 뿐 이스라엘 안에 어린 양의 피가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살아간다면 자신들은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놓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면 그 증거는 이웃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조건 없이 사랑하라는 뜻이다.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조건이 있을까? 자신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고, 뭐든지 아끼지 않으려고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이웃 사랑이 그랬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다.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시는 사랑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랑이다.
결국 주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이웃에 대해서 그 사랑이 증거 될 수밖에 없다. 사랑에 지배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랑을 해야 할 자와 할 수 없는 자로 구분할 수도 없다. 만약 주님이 우리에 대해서 그런 구분을 하셨다면 우리 중 누구도 구원 얻을 자는 없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 역시 이웃에 대해서 구분을 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율법을 이루는 삶이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아느냐이다. 주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알게 된 자는 그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웃을 대할 때에도 주님의 사랑으로 대하게 된다. 이것이 이웃 사랑이고 율법을 완성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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